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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명교(정과리)의 문신공방
[작품]걸어오는 십자가 1어깨 위에 어깨 올라서고 또 어깨 위에 어깨 올라서고 달빛도 별빛도 못 본 척 흘러만 갔다 돌이 요염한 모란꽃을 피우고 돌이 찬란한 공작새 날개 드리우고 돌이 햇볕을 삼켜버리고 돌이 바닷물을 마셔버리고 돌이 하늘을 다 차지해 버렸다 납작 깔린 입술이 부르르 떨리던 밤이 더욱 먹물로 차올라 길은 화약고가 터지듯이 날아가고...... 부러진 어깨들 하나씩 둘씩 보스락보스락 다 차지해 버린 하늘이 뇌 송 벼락 내리치며 쏟아붓는 빗줄기 흙탕물 속에 가랑잎처럼 떠내려가고 개미 떼처럼 발버둥 치며 떠내려가고 하늘은 죽었다고 소리 지르며 떠내려가고 흙은 어디 갔느냐고 울부짖으며 떠내려가고 등에 붙은 위장을 움켜쥐고 떠내려가고 말을 삼켜버린 입술들이 보스..
‘소울 메이트’가 말 그대로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영적으로 맺어져 있는 존재라는 뜻이라면, 내게 그런 사람이 점지되어 있었으리라고는 믿지 않는다. 다만 이른바 ‘케미칼’이 통하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다면 그건 그럴 듯하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그런 건 DNA문제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케미칼이 정말 잘 통해서 ‘소울 메이트’라고 부를만한 사람이 있다면 그런 사람은 분명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소울 푸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아마도 나의 신체적 화학 성분들의 분포에 잘 호응하는 음식들은 있을 것이다. 반대의 음식들도 있을 것이고. 그런 생각을 머리 속에서 궁글리다 보니 나는 어느새 희미한 기억의 문을 열고 들어가 한 소년을 만나게 된다. 그 소년은 학교를 마치고 막 집으로 돌아온 참..
※ 아래 글은 2014년에 발표된 것이다. 그 이후 ‘한류’에도 엄청난 변화가 일어났고 필자의 생각에도 얼마간의 변화가 있었다. 하지만 기본적인 입장은 여전하다. 『문신공방 2』에 실렸기에 블로그에 올리며, 사실적 자료로서도 유의한 면이 있다고 생각한다. I. 한류 현상의 실제와 범위 한류는 1990년대 말부터 한국의 대중문화가 동남아의 대중들에게 열광적으로 수용되기 시작하면서 붙여진 이름이다. 즉 한류란 국제적 규모에서 향유되는 한국 대중문화와 그 수용 현상을 묶어서 가리킨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서, 한국에서 제작되었고, 다른 나라의 문화와 변별되는 독자적인 문화적 특성을 공유하며, 한국에서의 향유에 그치지 않고 낯선 외국의 수용자군의 많은 수가 탐닉하게 되어 세계적인 인정을 받게 된 대중문화들과 ..
※ 이 글은 ‘문학과지성사’의 ‘대산세계문학총서’의 ‘기획의 말’로서 씌어진 것이다. 필자가 집필하고 ‘대산세계문학 발행 위원회’의 검토를 거쳐, 채택되었고, 현재 ‘대산세계문학총서’의 모든 책의 말미에 수록된다.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을 계기로 한국문학과 세계문학의 관계에 새로운 단계가 시작되었다는 판단하에 이 글이 유의미하리라 판단해 올린다. 21세기 한국에서 ‘세계문학’을 읽는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 자국문학 따로 있고 그 울타리 바깥에 세계문학 따로 있다는 말인가? 이제 한국문학은 주변문학이 아니며 개별문학만도 아니다. 김윤식·김현의 『한국문학사』(1973)가 두 개의 서문을 통해서 “한국문학은 주변문학을 벗어나야 한다”와 “한국문학은 개별문학이다”라는 두 개의 명제를 내세웠을 때, 한..
※ 이 글은 2014년 9월 19일 ‘국제비교한국학회’ 제 28회 국제 학술대회: ‘동아시아 타자인식과 담론의 과제’(교토: 도시샤대학교 코리아센터)에서 발표된 것이다. 1. 서양 문명의 세계적 확산 이후, 좀 더 구체적으로 동아시아인들에게 있어서는 18세기말부터 19세기에 걸쳐 집중적으로 진행된 서양의 제국주의적 동진 이후, 비서양인으로서의 동아시아인들에게는 자기에 대한 인식과 정립이 나날의 과제가 되었다. 2. 그런데 이 물음은 독자적이면서 동시에 서양적이라는 모순을 안고 있었다. 침입자에 대항하여 자신의 존재를 세운다는 점에서 반-서양적 독자성을 찾는 행위였으나 동시에 ‘자기 존재’의 기본 모형을 서양으로부터 학습했기 때문에 자신의 모습을 서양적인 방식으로 짜는 행위가 되었다. 요컨대 서양의 동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