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명교(정과리)의 문신공방
‘내’가 달성할 ‘그’의 완성- 동아시아인의 타자 인식이라는 모험의 어느 지점에 대하여 본문
※ 이 글은 2014년 9월 19일 ‘국제비교한국학회’ 제 28회 국제 학술대회: ‘동아시아 타자인식과 담론의 과제’(교토: 도시샤대학교 코리아센터)에서 발표된 것이다.
1. 서양 문명의 세계적 확산 이후, 좀 더 구체적으로 동아시아인들에게 있어서는 18세기말부터 19세기에 걸쳐 집중적으로 진행된 서양의 제국주의적 동진 이후, 비서양인으로서의 동아시아인들에게는 자기에 대한 인식과 정립이 나날의 과제가 되었다.
2. 그런데 이 물음은 독자적이면서 동시에 서양적이라는 모순을 안고 있었다. 침입자에 대항하여 자신의 존재를 세운다는 점에서 반-서양적 독자성을 찾는 행위였으나 동시에 ‘자기 존재’의 기본 모형을 서양으로부터 학습했기 때문에 자신의 모습을 서양적인 방식으로 짜는 행위가 되었다. 요컨대 서양의 동진 이후 동아시아인들에게 자기 찾기는 잃어버린 왕조를 회복하거나 민심을 깨닫는 행위가 아니라 개인 단위로서의 그 자신을 모색하는 일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한 물음은 서양이 가져 온 새로운 존재 양식mode d’existence인 ‘모더니티’ 속으로의 자발적 참여를 전제로 할 때만 가능한 것이었다.
3. 이러한 모순은 동아시아인들에게 우선 두 가지 극단적인 태도를 유발하였다. ‘서양 추수’의 태도와 ‘서양에 의해 망실되었다고 가정된 자기 것을 복원하고 그것에 근거하고자 하는 입장’이었다. 조선의 경우 그러한 극단적 대립은 개화파/위정척사파의 대립으로, 또는 모더니즘/조선심, 이식문화론/전통연속론의 대립 등으로 표현되었으며, 일상적 차원에서는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두 태도의 모호한 병존과 갈등을 자신의 내부에서 앓는 나날을 보내고 있다.
4. 다음 단계에 이 모순을 넘어서고자 하는 방법론들이 제출되었는데, 특히 두 가지가 두드러졌다. 하나는 이른바 ‘동도서기’론으로 요약될 수 있는 방법으로서, 서양 문명의 우월성을 특정 분야로 몰아넣은 뒤, 나머지 분야에서 독자적인 것을 보존하는 방법이었다. 그런 태도는 서양의 세계적 지배를 인정하면서도 서양과 경쟁할 수 있는 자기만의 고유한 가치를 구출해낼 수 있다는 믿음을 강화하고 그것을 실용적으로 활용하는 다양한 경로를 낳게 했는데, 가령 ‘유교자본주의론’은 최근까지도 그런 믿음이 강력한 힘을 발휘하고 있다는 것을 실증하였다. 그러나 이질적인 것들이 실용적 목표를 위해 쉽게 ‘결탁’할 수 있다는 이러한 관점은 순진한 환상이라고 보지 않을 수 없으며, 오늘날 아시아 여러 국가들의 경제 성장이 말 그대로 유교적인 인간관계에 의존하고 있는지 아니면 자본주의 초기에 보편적으로 목격되는 특정한 통제에 근거하는 것인지는 단정하기가 쉽지 않은 일이다.
5. 다른 하나는 이른바 ‘맹아론’이라는 개념으로 요약될 수 있는 것으로서, 서양적인 것을 보편적인 것으로 상정한 뒤, 동양에도 그러한 보편성이 발아할 수 있는 토양이 무르익고 있었다고 보는 관점이었다. 이러한 관점은 자신의 주체성을 세우는 일을 생업으로 삼은 지식인들에게 강렬한 유혹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은 그러한 맹아의 시기를 서양과의 교섭 이전 시기에서 찾을 수 없는 한 인정될 수 없는 것이다.(그리고 세계의 각 지역들은 알게 모르게 아주 오래전부터 다양한 방식으로 교류해왔던 것이다.)
6. 위 두 태도는 ‘자신에게 고유한 것’의 ‘세계적인 가치’를 내세우는 방향으로 일을 한 셈인데, 사실상 이 작업들이 불가능한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은 최근의 많은 연구들을 통해 집요하게 ‘증빙’되었다. 이 방향의 실패 이후 비교적 진지하게 사색한 비서양의 지식인들은 두 가지 상황을 동시에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된다. 서양적 가치(즉 모더니티)의 우월성을 인정해야만 한다는 것, 동시에, 서양적인 것의 폭력성을 목도하는 한 서양적인 것을 넘어서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 이러한 두 가지 확인은 여전히 비서양인들을 모순의 구렁에서 헤어날 수 없게 한다. 타자는 약이자 동시에 독이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독을 제거하고 약만을 추출해낸다는 것은 지난한 사업이 아닐 수 없다.
7. 타케우찌 요시미 선생의 「방법으로서의 아시아」는 이러한 궁지로부터 탈출할 새로운 길을 제시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서양적 가치의 보편성을 전제한 후, “서구적인 우월한 문화가치를 더욱 대규모적으로 실현하기 위해 서양을 한 번 더 동양에 의해 되감싸 안아 거꾸로 서양 자신을 이쪽으로부터 변혁한다는 이 문화적인 되감기,또는 가치상의 되감기에 의해 보편성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것을 그는 “방법으로서의 아시아”라고 명명하였는데, 그 스스로 ‘방법으로서의 아시아’가 실핼될 ‘방법’을 제시하지는 않아, 후학들이 그 과제를 넘겨받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8. 그러나 그가 스스로 결론을 흐려버린 데에는 무의식의 은폐가 작동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타케우찌 선생의 논지를 꼼꼼히 살펴 보면, 그것은 아시아적 가치가 부인된 상태에서 서양적 가치의 완성을 서양인으로부터 빼앗아 미래에 상정해 놓고 그 미래를 도래케 할 주역을 아시아인, 혹은 제 3세계인으로 설정하는 알고리즘으로 이루어진 것임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서양을 완성하기 위해 동양인이 뛰어야 한다는 것이다. 타자의 이상을 내가 달성해야 한다는 이 아이러니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9. 놀랍게도 우리는 이러한 태도를 에드워드 사이드Edward Said에게서도 발견할 수 있다. ‘오리엔탈리즘’이라는 용어의 창시자로서 서양인이 동양을 상상적으로 창출해 놓고 활용한 논리를 폭로해 수많은 지식인들의 공감을 얻어내고 제 3세계 사람들에게 서양을 공격할 확실한 명분을 제공한 그가 돌아가기 직전에 끈질기게 매달린 ‘말년의 양식late style’은 그 개념 자체가 아도르노Adorno에게서 빌려온 것이기도 하지만, 사이드가 그 개념을 가지고 하고자 한 것은 아도르노보다도 더 철저하게 그 양식을 완성하는 것이었다. 더 나아가 그가 참조하고 있는 문헌 및 지식인들은, 현존하는 그리스 사회학자 한 사람을 제외하면 모두 서양인들이 보편적 지식인의 자리에 올려놓은 사람들과 그들의 저서 일색이었다. 그렇다면 그의 오리엔탈리즘 비판은 결국 서양적인 것과 동양적인 것의 차이를 무화시킨 보편적 가치 영역의 존재를 가정한 것일까? 그 가정에 의해서 특수성을 가정하고 활용하는 모든 태도를 비판의 대상으로 삼았던 것일까? 그러나 그런 입장에 서게 되면 실질적으로 오리엔탈리즘을 논의할 근거가 모호해지고, 그것에 분개할 까닭도 사라지게 된다. 왜냐하면 오리엔탈리즘 비판이 제대로 실천되려면 서양인에 왜곡당한 동양인의 역사적 경험에 근거해야 하는데, 그것은 저 보편성의 전제와 실질적으로 무관하거나, 기껏해야 부수적인 것으로밖에 간주될 수 없기 때문이다.
10. 아마도 타케우찌나 사이드가 보여준 태도가, 정직하게 자신의 삶을 대면하고자 했던 비서양계 지식인이 가 닿는 불가피한 자리라는 것을 납득해야만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 태도는 서양적 가치의 우월성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 자신의 고유성에 대한 환상을 포기할 수밖에 없을 때 취해야 할 태도이기 때문이다. 대신 그들은 그 서양적 가치의 우월성을 보편적인 것으로 치환하는 수식 변환을 통해 서양 맹종의 위험에서 벗어났다 그 수식 변환은 두 가지 절차로 이루어졌다. 첫째, 서양적 가치의 우월성을 보편적인 미래가치의 전 단계로 만드는 것. 둘째, 그 치환을 통해서 보편적 미래가치의 주체를 서양에서 인류 전체로 돌리는 것. 그럼으로써 비서양인이 그 일에 가담할 수 있는 근거를 만드는 것.
11. 마침내 우리는, 인류사에서 그 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완전히 새로운 삶의 양식을 서양이 처음 열었음을 기꺼이 인정하면서 동시에 서양인이 문만 열어 놓은 자리에 동양인의 팔다리가 춤추며 놀 공간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는 말 그대로 새로운 세계의 문지방을 겨우 건넌 상태에 있을 뿐이다. 실제로 동양인을 포함한 인류 전체가 새로운 보편적 세계의 확대에 기여하기 위해서 해야 할 일에 대한 논구는 거대한 바위처럼 우리를 가로막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12. 무엇보다도 다음과 같은 점이 고려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첫째, 서양적인 우월성이 그대로 보편적 가치로 전환되는 것이 가능한지를 묻는 것이다. 최인훈의 『태풍』에서 식민지 ‘애로크’ 출신인 ‘오토메나크’ 중위는 식민본국 ‘나파유’ 제국의 군대 안에서 진정한 나파유인이 되기 위해서 나파유 인들보다다 더 뛰어난 나파유인이 되기로 결심하고 그것을 실행한다. 그러한 그가 결국 맞닥뜨리는 것은 나파유가 세계대전에서 패배한다는 사실의 ‘자발적 망각’ 속에서 헤어나지 못한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서양인의 우월성이 보편성으로 전환되는 것은 서양의 논리 궤도 안을 순환해서는 결코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보편성은 서양적 가치의 연장선 상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서양적 가치에 바깥으로부터의 다른 생각 및 가치들이 이접되어 서양적 가치를 변화시키는 데서 이루어질 것이다.
13. 둘째, 이 가정의 연장선상에 우리는 자연스럽게 비서양적 가치들의 ‘구성적 가치’를 재고해야만 할 것이다. 왜냐하면 서양에 대한 바깥으로부터의 사유는 결국 서양 내부의 ‘서양으로부터 배제된 자리’이거나 서양 바깥의 지대, 즉 동양을 포함한 비서양적 지대에서 출현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미 아시아적 가치의 특수성과 고유한 본질을 부정한 상태에서, 적어도 그 열등성을 전제한 상태에서, 어떻게 세계구성적인 동아시아적 가치를 캐낼 수 있을 것인가? 아마도 여기에 생각의 전환이 필요할 지도 모른다. 서양적인 것의 바깥으로서 기능할 동양적인 것은 위대한 것이 아니라, 미미하고 보잘 것 없는 것으로 현존하고 있다고 말이다. 즉 그것은 과거에 현존하는 위대한 동양적 전통이라기보다 오히려 보잘 것 없는 상태로 버려져 있으나, 아니 차라리, 그런 상태로 버려져 있음으로써 미래에 예측불가능하게 자라날 가능성이 그만큼 큰 보잘 것 없는 것들의 불씨를 쌀려서 크게 키우는 데서 출현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성질을 품은 것들이야말로 자신의 모태인 동양 전체를 변혁시킬 수 있는 잠재력과 서양적인 것과의 이접력이 뛰어나서 동양적인 것과 서양적인 것을 동시에 변개시킬 가능성을 크게 확보할 것이기 때문이다.
14. 한 마디 덧붙이자면, 우리가 키워서 보편적 가치의 완성에 쓰이게 할, 미미하고 보잘 것 없는 동양적 가치는 우리가 위대한 것이라고 자랑하는, 그러나 서양적인 것과의 대결에서 무참하게 패배했던, 공식적인 가치를 뒤집어 생각하는 데에서 나올 수도 있고, 혹은 동양의 지배적 가치로부터 억압된 주변적인 가치들에서 나올 수도 있을 것이다. (2014.09)
'문신공방 > 문신공방 둘'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내가 평생 먹어왔고 먹을 비빔밥 (5) | 2024.11.20 |
---|---|
한류의 현황과 가능성 (6) | 2024.11.20 |
마침내… 한국문학이 세계문학의 항구에 닻을 내렸나 (3) | 2024.11.13 |
세계화 속에서의 한국문학의 방향 (1) | 2024.11.13 |
어떤 토론 (3) | 2024.10.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