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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명교(정과리)의 문신공방
이 달에 발표된 이성복과 유병근(劉秉根)의 시들(『문학사상』, 『한국문학』)이 흥미롭다. 이 시들은 한국문학의 오래된 주제 중의 하나인 ‘한(恨)’의 문제에 새롭게 접근한다. 우리에게 ‘한’을 노래한 시들이 유달리 많았다는 것은, 혹은 그런 시들이 애송된다는 것은 우리에게 잃어버린 것, 빼앗긴 것, 헤어진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 잃음과 박탈과 이별이 느닷없고 부당하며 납득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한국의 근·현대사는 그 잃음·박탈·이별을 야기한 사건들로 점철되어 있다. 그리고 그것들의 ‘장기지속’은 한국인의 집단무의식 속에 넓고 깊게 스며들어 ‘한’이라는 독특한 심리구조를 형성하였다. 시인들은 끊임없이 그 한을 시로 노래해 해원과 회복을 꿈구어 왔다. 행동가들은 죽음을 불사하며 그것..
우리는 대체로 네 겹의 생각 속에서 살고 있다. 맨 바깥에 감정 그 자체인 생각이 있다. 그 아래엔 논리화된 생각이 있다. 더 깊은 곳엔 반성적 성찰이 움직이면서, 논리가 품고 있는 이기심을 풀어 헤쳐 보다 많은 사람들이 동의할 수 있도록 생각의 피륙을 짠다. 그러나 때로 이 성찰이 크레인의 쇠공처럼 난폭해지는 순간이 있다. “사랑하라, 무조건 사랑하라” 같은 명령은 사랑의 예외적 가치에 근거하고 있으나 그것을 이해하지 못한 사람의 몸속에서는 광란을 유발할 수도 있다. 이성복 산문의 생각은 그 아래에서 움직인다. 반성적 사유가 절대적 명제로 굳어버리는 걸 경계하고 그것이 본래 질문이라는 것을 환기시키면서, 그것이 스스로 대답을 찾아가는 과정 속에 독자를 동참시킨다. 우리는 이러한 사고의 움직임을 근본성의..

우리는 일반적으로 정서적 압축을 통해 삶에 대한 이해와 느낌을 순수한 언어의 결정(結晶)으로 빚어낸 것을 시라고 배워 왔다. 시에서 통일된 이미지를 사람들이 기대하는 건 이로부터 비롯된다. 이성복의 시가 1980년대 초엽에 처음 발표되었을 때, 독자들은 그러한 기대가 철저하게 무너진 것을 보고 경악한다. 거기에 “잘 빚어진 항아리”(Cleanth Brooks)는 없었고, 찢기고 파편화된 이미지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 이미지들은 조각났지만 선명했고 알쏭달쏭하지만 강렬한 정서적 울림을 가지고 있었다. 이성복 시의 이 형태적 반란의 배경에는 1980년을 전후해 한국사회의 내부에서 들끓는 모순들의 첨예한 충돌이 놓여 있었다. 한편으로 한국사회는 제 3공화국의 경제근대화 정책이 효과를 얻어 ..

『그 여름의 끝』(문학과지성사, 1990)은 이성복의 세번째 시집이다. 『뒹구는 돌은 언제 잠깨는가』와 『남해 금산』을 거쳐 그가 다다른 이번 시집의 세계는 그의 시적 주제는 이전과 변함이 없는데, 그의 시적 관점은 조금씩 이동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해 준다. 그의 시는 언제나 고통과 평화 사이에 있었다. 시인은 말한다. “세상에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가장 더러운 진창과 사람들의 손이 닿지 않는 가장 정결한 나무들이 있다 세상에는 그것들이 모두 다 있다 그러나 그것들은 함께 있지 않아서 일부러 찾아가야 한이 그것들 사이에 찾아야 할 길이 있고 시간이 있다”(「산」).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의 시는 언제나 고통과 평화를 함께 찾아가는 시간이며, 길이었다. 그 시간은 그러나 수많은 나날과 수없는 고장을 ..
예심을 통해 올라온 모든 시집을 다 말하지는 못하고 그 동안 이해가 부족했다고 생각되는 것들을 몇 권 골라 손끝 가는 대로 느낌을 두드려 본다. 김기택의 『소』는 환희는 물론 아니지만 슬픔도 아닌 세계, 어떤 몇 개의 정서들로 결코 요약할 수 없지만 그러나 전율적인 실감을 자아내고 있는 세계를 현상한다. 그 전율적인 실감 때문에 그 세계에서는 모든 감정이 배제되었는데도 억눌린 감정의 응집체 같은 것이 묘사의 울타리를 압박하고 있다. 그 세계는 결코 다른 것으로 변환되지 않고 눌어붙기만 하는 일과(日課)의 세계, 삶이라는 노역이 막막히 덧쌓이기만 해서 형성된 세계이다. 삶이 왜 이 모양인가? 모든 존재와 사물들과 사건들이 철저히 이질성의 상황 속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만남이 있으나 교통이 없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