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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명교(정과리)의 문신공방
김수영은 굳은 통념, 상투화된 지식을 경멸하고 경계하였다. 그의 마지막 시 「풀」을 민중의 질긴 생명력에 대한 비유로 보는 견해가 매우 그럴 듯해서 지배적인 통념으로 자리잡은 것은 얼마간은 아이로니컬한 일이다. 모든 풀이 질경이는 아닌 데도 말이다. 그런 점에서 임우기씨의 새로운 해석(「巫 혹은 초월자로서의 시인―김수영의 「풀」을 다시 읽는다」, 『현대문학』, 2008.08)은 무더운 여름의 소나기와 같은 상쾌함을 선사한다. 더욱이 시인의 언명과는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기에 이 기발한 해석은 충격적이기조차 하다. 시인은 전 생애를 걸쳐 ‘현대’를 나침반으로 삼았고 ‘현대의 명령’에 의거해 시의 끊임없는 자기 갱신을 주장하였다. 그런데 임우기씨는 현대가 아니라 ‘신화’를 내세우고 있는 것이다. 현대와 신화..
최근에 무슨 표절 사태가 있었나 보다. 새벽부터 우리 과의 유 시어도어 준 교수가 '카카오톡'으로 나를 불러내어 표절 현상에 대해 물어봤다. 유교수와 이런저런 사담을 나누다가(매우 시니컬하고 자조적인 그래서 썩 많은 웃음을 함유한 대화였으나, 지극히 사적인 내용들이 있어서 공개할 수는 없다), 김수영의 「시작노트 6」을 읽어 보기를 권하였다. 아래는 김수영의 글의 일부이다. 나는 번역에 지나치게 열중해 있다. 내 시의 비밀은 내 번역을 보면 안다. 내 시가 번역 냄새가 나는 스타일이라고 말하지 말라. 비밀은 그런 천박한 것은 아니다. 그대는 웃을 것이다. 괜찮아. 나는 어떤 비밀이라도 모두 털어내 보겠다. 그대는 그것을 비밀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것이 그대의 약점이다. 나의 진정한 비밀은 나의 생명밖에..

✍ 최근에 발간된 어떤 잡지의 표지에 “미국 분열 이후의 세계, 어떻게 대응할까”라는 글귀가 특집 제목으로 실려 있다. 무슨 말인가 궁금해서 서문을 뒤졌더니, “이번호 특집은 미국의 심각한 분열과 미중 간의 치열한 전략경쟁으로 말미암은 세계질서의 변동 양상을 진단하고 이에 걸맞은 우리의 대응 방향을 탐색하는 글들로 꾸렸다”라고 쓰고 있다. 이 설명은 궁금증을 더 키운다. “미국의 심각한 분열”? 트럼프 전 대통령을 둘러싼 일련의 해프닝을 가리키는 것인가? 아니면 미국에서 ‘남북전쟁’이 재발했나? 아니면 그랬으면 하는 소망의 ‘촌철살인적’ 표현인가? ✍ 악수신기전(惡手神機箭) 괴리씨는 바둑을 모르지만, “장고 끝에 악수”라는 말은 많이 들어서 기억하고 있다. 최근의 어느 장소에서는 장고라기보다는 수를 낼 ..

‘진실’이라는 단어를 처처에 박아 놓은 어떤 책을 읽다가 “김수영은 혁명은 안 되고 당만 바꿨다고 개탄했”다는 구절을 읽고 기가 막혔다. 김수영은 “방만 바꾸어 버렸다”고 말했지, ‘당’을 바꾸었다고 하지 않았다. 왜 이런 오류가 일어났는가? 기억의 착오일 수도 있겠으나, 김수영의 시를 실제 읽지 않아서 벌어진 일이라면, 다시 한번 한국 지식인들의 얄팍함을 ‘개탄’하게 할만한 일이다(김수영을 읽은 사람이라면 그가 그런 말을 하리라는 걸 상상할 수 있겠는가?). 아주 오래전 일이지만 이런 일도 있었다. 어느 고위 관료가 은퇴를 하면서 TV에서 지나온 시절에 대해 인터뷰를 했다. 그 안에 ‘내 인생의 화두’라는 항목이 있었다. 고위 관료가 빈 칸에 ‘윤동주’를 적고는 윤동주의 시 한편을 들었다. TV 화면에..

강은교는 한국 시사상 가장 주술적인 시인이라고 할 것이다. 그의 시는 시종이 없는 무한의 노래로 들린다. 이 무한의 노래는 저녁에 시작되어 새벽까지 이어지고 이튿날 아침 햇살에 바톤을 넘기고는 다시 저녁에 시작되는 일을 되풀이하고 되풀이해서 오늘에서 고생대 사이의 무한 순환으로 나아간다. 저녁에 양파는 자라납니다 푸른 세포들이 그윽이 등불을 익히고 있습니다 여행에 둘러싸인 창틀들, 웅얼대는 벽들 어둠을 횡단하며 양파는 자라납니다 그리운 지층을 향하여 움칫움칫 사랑하는 고생대를 향하여 갈색 순모 외투를 흔듭니다 저녁에 양파는 자라납니다 움칫움칫 걸어나오는 싹 시들며 아이를 낳는 달빛 아래 그리운 사랑들 (「시든 양파를 위한 찬미가」, 『아직도 못 만져본 슬픔이 있다』, 창비, 2020.11 ) 하루의 순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