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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명교(정과리)의 문신공방
김종철의 『못의 귀향』(시학, 2009)은 기본적으로 이야기의 세계이다. 이야기는 대체로 옛날의 신산한 삶을 애틋이 회상하는 일을 한다. 그 점에서 이야기는 위로와 용서, 거둠과 정돈의 역할을 하는 것, 다시 말해 격했던 마음을 가라앉히고 삶을 넉넉히 받아들이게 하는, 통풍 잘 되는 바구니 같은 것이다. 독특한 것은 그의 이야기가 은밀하게 두 이야기로 겹쳐져 있다는 것이다. ‘삶 이야기’와 ‘말 이야기.’ 그것은 그의 ‘삶 이야기’가 충분히 다스려지지 않는 데서 나온다. 즐겁게, 흔감히 추억하지만 뭔가가 못에 걸린 듯 떨어져 그 스스로 못이 되어 몸의 어느 구석을 슬그머니 찌른다. “못의 귀향”은 ‘못의 귀환’이다. 가령, 식구들이 “밤새 잘 발라 먹은 닭뼈”라든가, “내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그렇..
1.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정현종 시인은 신천옹이다. 넓은 의미에서 모든 시인이 그러하지만 정현종 시인은 특히 그렇다. 그 증거는 그의 시에 있다. 그는 한국의 대부분의 시인들이 고통을 토설할 때에 행복을 노래하고, 그럴 권리를 거듭 주장하였다. 그것은 그가 낙원의 기억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2. 정현종이 전하는 낙원의 기억은 그러나 인간의 언어로 발설될 수가 없고 인간의 지능으로 해독되지 않는다. 그것을 전달하는 매질은 언어이되 언어의 형태로서가 아니라 천상적 삶의 물질적 실물들로서 나타난 것들이다. 천상적 생의 형상이란 삶의 적나라하고 구체적인 실상으로부터 오는 실감을 담았으되 그것들을 담뿍 소화하여 맑게 정화하는 운동 그 자체로서 드러난다는 것을 가리킨다. 그러니까 그것은 곧 가장 깊이 드나들면..
김광규의 시선집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문학과비평사, 1988)를 읽으면서 나는 김주연에 의해 명명된 후, 그의 시에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는 ‘범속한 트임’의 의미를 되묻는다. 널리 알려져 있듯, 시인이 그리는 세계는 이른바 소시민적 일상의 세계이다. 그 세계에는 한편으로 강압적이거나 혹은 은밀히 조직적인 권력의 억압이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그 억압에 의해 알게 모르게 숨막히고 주눅들어서 왜소해질대로 왜소해진 사람들과 사물들이 있다. 시인은 그러한 삶에 맥없이 이끌려다니는 사람들의 상태를 전하면서 그것이 얼마나 ‘자연스럽지’ 못하며, 쓰라린 결핍과 지저분한 잉여를 동시에 낳는가를 폭로하고 비판한다. 그러나 주목할 점은 폭로와 비판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가 일상인의 삶을 비추어보는 거울로 사용..
나라 안팎이 시끄럽다. 이른바 세계인의 축제가 벌어지고 있는가 하면 군사 쿠데타가 두 군데서나 터졌다. 귀가 멍멍한 판에 나는 또 하나 고막을 진동시키는 시를 소개하고자 한다. 정현종의 「천둥을 기리는 노래」가 그것이다. 소리의 크기로 치자면 천둥만한 것이 있겠는가. 하늘이 울리는 소리이니 말이다. 하지만 요란하지도 그악스럽지도 않다. 하늘이 울리는 소리니 맑고 드높을 밖에. 한데 인간이 만들어 놓은 것은 그게 설사 하늘이거나 괴물일지라도 인간의 은밀한 욕망이 새겨진 것이 아닐 수 없으니 그 놈이 어느 연금술로 주물(鑄物)되었는지를 살펴보는 게 유익하리라. 시인이 기리는 천둥은 지난해(1987) 여름 “천지 밑빠지게 우르릉대던” 민주화운동이다. 시인은 “항상 위험한 진실”이고 “죽음과 겨루는 나체”인 그..
『결정본 김지하 시전집』(도서출판 솔, 1992)이 출간되었다. 편자와 시인에 의하면, ‘결정본’이 필요했던 이유는, 시인의 “복잡하고 험했던 인생 탓에” 방치될 수밖에 없었던, 기존 시집들의 편집·교정의 오류들을 바로잡아야 할 필요를 느꼈기 때문이라 한다. 편집자는 「편집자 일러두기」에서 그 내력을 얘기하고, 2권 말미의 「편집자 주」에 그 세목들을 밝혀놓고 있다. 아마도 이 책이 김지하 시의 이해에 줄 수 있는 가장 큰 공헌은 김지하의 초기시와 후기시 사이에는 지금까지 알려져왔던 것과 같은 단절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밝혔다는 것일 것이다. 황토 이전과 황토 이후로 나뉨당했던 김지하의 초기시들은 모두 황토와 같은 시기에 씌어진 것들이다. 황토는 그 중 정치적 효용성이 강한 것들을 뽑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