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심사평, 추천사 등/개활지의 경연 (4)
정명교(정과리)의 문신공방
[작품]걸어오는 십자가 1어깨 위에 어깨 올라서고 또 어깨 위에 어깨 올라서고 달빛도 별빛도 못 본 척 흘러만 갔다 돌이 요염한 모란꽃을 피우고 돌이 찬란한 공작새 날개 드리우고 돌이 햇볕을 삼켜버리고 돌이 바닷물을 마셔버리고 돌이 하늘을 다 차지해 버렸다 납작 깔린 입술이 부르르 떨리던 밤이 더욱 먹물로 차올라 길은 화약고가 터지듯이 날아가고...... 부러진 어깨들 하나씩 둘씩 보스락보스락 다 차지해 버린 하늘이 뇌 송 벼락 내리치며 쏟아붓는 빗줄기 흙탕물 속에 가랑잎처럼 떠내려가고 개미 떼처럼 발버둥 치며 떠내려가고 하늘은 죽었다고 소리 지르며 떠내려가고 흙은 어디 갔느냐고 울부짖으며 떠내려가고 등에 붙은 위장을 움켜쥐고 떠내려가고 말을 삼켜버린 입술들이 보스..
[작품] 농담이우디*우는 얼굴이 웃으며 지나간다 입이 막힌 영상을 보다가 봄이 죽은 소식을 읽는다 너머에서는 총알이 현관문을 열고 나갔다는 소식이 자막으로 흐른다 아무도 없는 텅 빈 가게가 붐빈다 급발진한 말들이 꽃보다 붉다 개나리가 만발한 들판에서 잠시 죽어도 될까 귀를 세우고 죽은 봄을 기다린다 오지 않는 얼굴을 미리 읽는다 웃으며 지나가는 얼굴이 화면을 가득 채운다 이 농담을 끝내고 싶은데 화약 냄새가 닫힌 문을 열고 들어온다 얼룩진 군복의 탈주병들이 우르르 쏟아진다 나를 겨냥한 말들이 앞발을 세운다 눈을 가린 나는 바람에 올라탄다 나의 무게를 견디는 게 무엇인지 묻는다 대답이 없다 자연처럼 무안하지 않다 오후 2시가 넘어서야 베일을 벗은 오늘을 아름답다 해야 할까 외출하지 않는..
[작품]깃털을 싣고 달리는 기차지정애기차가 기차로 출발할 때 비의 밧줄에서 풀려난 커다란 동물은 사바나인 듯 휙휙 기차에서 솟아나는 아침으로 비는 아이들의 입과 눈을 커다랗게 만든다 푸르고 눈부시게 섞이는 비의 허리와 아이들의 다리 실로폰이 되고 뛰는 나무가 된다 기차의 엔진은 지평선을 뚫고 밤의 내장에 갇혀 있던 욕망 차창 밖으로 날아간다 한 아름 드라이플라워로 기차가 기차의 좌석이 되는 동안 구름으로 구름의 입모양을 만든다 고양이의 잠처럼 고요하고 낮은 침묵의 의자 공중의 울대에서 우렁찬 노래 흐를 때 금요일의 맥주 거품은 내일의 태양 어제의 입술이 되고 거리를 배회하는 영혼은 해안선에 젖으며 꿈을 더듬는다 기차가 기차의 끝에 이르면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슬픔은 다른 이름을 갖게 된..
[작품]메디팜*의 밤 김필아잣나무 숲에 바람 불어 머리 위 맴도는 검은 파도입니다 개들은 냄새로 기억하고 갓 태어난 아이의 울음엔 눈물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달을 거슬러 눈 아래 눈물이 생긴다고 말합니다 부드러운 양수의 맛을 기억하려는 태아처럼 나는 새벽에 몸을 동그랗게 말고 자는 검은 개의 꼬리에 흰 고요가 괴여있다고 말합니다 당신은 녹아내리는 어둠에 감꽃을 꿰어 줍니다 며칠 전 화분을 들였습니다 꽃을 들이는 것은 나무의 미래를 품는 것이라 당신은 말하겠지만 나는 돌의 감정을 눌러 놓고 꼬리에 파도를 감추는 어항 속 물고기 같습니다 나는 메디팜을 붙이는 사람, 겨울밤의 어깨에 꼭꼭 눌러 붙이는 사람, 메디팜 속에서 밤의 진물 나고 수그러지고 새 지고 꽃잎 트는 아침, 그늘이 봄의 말을 합니다 꽃도 새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