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문신공방 (146)
정명교(정과리)의 문신공방
※ 2000년 팔봉비평문학상 수상소감.지난 8일 팔봉 비평문학상이 저에게 주어졌다는 한국일보사의 사고(社告)와 함께 심사보고서, 심사평 그리고 인터뷰 기사를 읽으면서, 저는 무척 겸연쩍었습니다. 줄곧 남의 글에 대해서만 얘기를 하던 사람이 갑자기 자신에 대한 글을 읽게 되었을 때, 그것도 논쟁적인 시비가 아니라 과분한 평가를 들었을 때, 물건을 사러 시장에 들어간 사람이 장바구니에 담겨 나오는 듯한 황망함이 스쳐지나가지 않을 리 없습니다. 그 쑥스러움을 이기기 위해 찬사를 받는다는 건 욕을 먹는다는 것보다도 더 괴롭다는 생각을 억지로 키우고 있었습니다.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저는 이 쑥스러움이 심한 부끄러움으로 변해 가는 것을 느꼈으며, 급기야는 북북 긁어대고 싶은 붉은 염증이 얼굴 전체를 뒤덮는 기분..
※ 2005년 김환태평론상 수상소감이다.현대에서의 문학상의 특징은 그것이 위에서 아래로 내리는 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국가가 주는 훈장도 아니고 사장이 주는 포상도 아닙니다. 문학상은 문학과 관련된 어떤 사설 단체가 문학하는 사람들에게 의뢰해 역시 문학하는 사람에게 주는 상이지요. 그 상의 발생기원과 그것이 노리는 효과에 대해서는 「문학상의 역사와 기능」이라는 글에서 졸견을 밝힌 적이 있으니 필요하신 분은 참조하시길 바랍니다.그 글에서 빠진 얘기를 좀 더 덧붙여 보겠습니다. 요컨대 문학상의 유통체계는 원환적으로 움직이는 비행접시를 닮았습니다. 그 점에서는 문학하는 일과 문학상을 주고받는 일 사이에는 큰 차이가 없습니다. 그것들은 모두 언어의 진흙을 수평으로 회전시키면서 문학이라는 항아리가 빚어지..
※ 2015년 편운문학상 비평부문 수상 소감이다.고등학생 때 편운선생의 「의자」를 교과서에서 읽었습니다. ‘소년이로학난성(小年易老學難成)’도 그 즈음에 배웠덧 탓인지, 저는 그 ‘묵은 의자’가 나를 비껴갈 것만 같아 부르르 조바심치곤 했습니다. 아주 멋 훗날 그 시를 다시 읽었을 때 문득 깨달았습니다. 이 의자는 모든 이가 비껴 갈 수밖에 없도록 거기 그렇게 놓여 있다는 것을. “지금 어드메쯤” “아침을 몰고 오는 어린 분”과 “묵은 이 의자” 사이에는 결코 좁혀지지 않는 평행의 거리가 팽팽히 긴장하고 있다는 것을. 단지 저 멀리에서 하나로 만나는 듯한 착시를 유발하는 철길처럼, 그렇게 모호한 미래가 과거와 오늘을 떠밀고 있다는 것을.아마도 우리는 이 시를 문학의 은유로 읽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더욱이..
※ 이 글은 1992년 현대문학상 비평 부문에 대한 수상 소감으로 씌어진 것이다.가끔 머리 속에 입력되지 않은 단어들이 불청객처럼 전정기관을 타고 방문할 때가 있습니다. 가르가멜이 소 내장을 과식하고 가르강튀아를 낳았던 그 통로 말입니다. 한 우주가 빠져나간 구멍인 탓에 옛 사람들은 결코 남의 시선을 끌 일이 없는 거기를 자주 청소한 모양입니다. 그러나 생식의 신이라면 늘 데리고 다니는 문지기 사자도 없어서 이 동굴 안으로 온갖 물질들이 들락날락 거립니다. 하긴 그것들도 우주의 일부입니다. 우주란 본래 먼지 덩어리 아닙니까. 아마도 제가 난처해 한다면, 그것은 문화 제도의 움직임을 살펴보고자 하는 사람이 그 제도의 한 살점이 되는 사태가 일어났기 때문일 터입니다. 코끼리를 냉장고에 넣듯이, 현미경을 시료..
※ 이글은 1992년 제 4회 ‘소천비평문학상’ 수상 소감으로 씌어진 것이다.제가 소천비평문학상을 받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의 당황함을 여러분께 어떻게 말씀드려야 할 지 모르겠습니다. 저의 변변찮은 글이 상을 받을 만한가가 의심스러울 뿐만 아니라, 제가 그려온 짧은 비평의 궤적이 도통 상과는 어울리지 않는 일이기도 하였기 때문입니다. 문학과 문화제도 사이의 관계에 더듬이를 대고 분석적 행위에 익숙한 사람에게 이런 향연에의 초대는 자신이 친 그물에 직접 걸리는 시험 앞으로 그의 등을 얄궂게 떠다밉니다. 그러나 그 손바닥은 부드럽고, 그것을 통해 제 마른 심장을 적시며 들어와 퍼지는 것은, 다정이 병이지 않은 분들의 저에 대한 따뜻한 사랑과 격려입니다. 그 넘치는 따뜻함은 실은 그것이 문학의 오래된 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