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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명교(정과리)의 문신공방
저 순백의 치자꽃에로 사방이 함께 몰린다. 그 몰린 중심으로 날개가 햇빛에 반사되어 쪽빛이 된 왕오색나비가 내려 앉자 싸하니 이는 향기로 사방이 다시 환히 퍼진다. 퍼지는 그 장엄 속에선 시간의 여울이 서느럽고 그 향기의 무수한 길들은 또 바람의 실크자락조차 보일 듯 청명청명, 하늘로 열려선 난 그만 깜깜 길을 놓친다. 놓친 길 바깥에서 비로소 破精 을 하는 이 깊은 죄의 싱그러움이여 ! - 고재종, 「장엄」(『그때 휘파람 새가 울었다』, 시와시학사, 2001) 서정의 극점을 비추는 시다. 극점이 보인다는 것은 서정의 표준이 아니라는 뜻도 된다. 서정을 ‘자기의 순수한 제시’라는 말로 요약한다면, 이 시는 그 자기 표현의 끝에서 문득 자아의 소멸을 겪는다. “저 순백의 치자꽃..

황인숙의 시들(『새들은 하늘을 자유롭게 풀어놓고』, 문학과지성사, 1988)은 탄성의 바닥을 싱싱하게 튀어오른다. “얏호, 함성을 지르며 / 자유의 섬뜩한 덫을 끌며 / 팅!팅!팅! 시퍼런 용수철을 튕긴다.” 그는 세상의 깊이를 무시한다. 세상을 그는 미끄럼 지치거나, 고양이의 발을 가지고 사뿐사뿐 뛰고 쏘다니고 내닫는다. 말을 바꾸면 세상은 알 수 없는 비밀을 가진 해독(解讀)의 대상이 아니다. 그가 ‘분홍새’를 보았다해서 “무슨 은유인지, 상징인지” “갸우뚱 거릴” 필요는 없다. 그것이 무엇인가에 관계없이 그는 장난하듯 세상을 놀고 세상을 어린이의 상상 속에서처럼 자유롭게 변용한다. 그 장난이 얼마나 혈기방장한가 하면, “지구를 팽이처럼 / 돌리기. / 쉬운 일이다. / 사시나무 등어리건 초등학교의 ..
※ 이 글 역시 앞의 글과 마찬가지로 김혜순 시인의 『날개환상통』(문학과지성사, 2019)이 전미도서비평가협회상(The National Book Critics Circle·NBCC) '시부문'에서 수상한 걸 계기로 올린다. 이 글 또한 필자의 『'한국적 서정'이라는 환(幻)을 좇아서 - 내가 사랑한 시인들 세 번째』(문학과지성사, 2020)에 수록되었다. ‘나무’는 인류의 집단 무의식에서 가장 뿌리 깊은 이미지 중의 하나일 것이다. “뿌리 깊은 나무”라는 말이 있듯이 말이다. 한 사전에 의하면 나무는 “가장 풍요하고 가장 널리 퍼진 상징재 중의 하나[1]”이다. 사전의 집필자는 이어서, 엘리아데Mircea Eliade가 ‘성스러운 것’과 만나려는 인류의 심성은 그것이 지상에 자리잡을 수 있는 중심의 자리..
* 고재종의 「장엄」 서정의 극점을 비추는 시다. 극점이 보인다는 것은 서정의 표준이 아니라는 뜻도 된다. 서정을 세계의 자아화라는 말로 요약한다면, 이 시는 그 자아화의 끝에서 문득 자아의 소멸을 겪는다. 그 충만과 소멸 사이의 긴장을 장엄이라고 말할 수 있다. ※ '서정=세계의 자아화'라는 상투적인 규정이 매우 그릇된 것이라는 견해를 글로 만든 적이 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하길 바란다: 「‘서정’을 규정하는 이 땅의 희극에 대해서: ‘한국적 문학 장르’ 규정 재고 一‘세계의 자아화’라는 허구 혹은 ‘보편적 자아’의 끈질김」, 『‘한국적 서정’이라는 환을 좇아서』(2020). 이 견해에 근거하면, 「장엄」은 차라리 '서정의 근본'에 육박했다고 해야 하리라. * 김영승의 「瀕死의 聖者」 김영승은..
예심을 통해 올라온 모든 시집을 다 말하지는 못하고 그 동안 이해가 부족했다고 생각되는 것들을 몇 권 골라 손끝 가는 대로 느낌을 두드려 본다. 김기택의 『소』는 환희는 물론 아니지만 슬픔도 아닌 세계, 어떤 몇 개의 정서들로 결코 요약할 수 없지만 그러나 전율적인 실감을 자아내고 있는 세계를 현상한다. 그 전율적인 실감 때문에 그 세계에서는 모든 감정이 배제되었는데도 억눌린 감정의 응집체 같은 것이 묘사의 울타리를 압박하고 있다. 그 세계는 결코 다른 것으로 변환되지 않고 눌어붙기만 하는 일과(日課)의 세계, 삶이라는 노역이 막막히 덧쌓이기만 해서 형성된 세계이다. 삶이 왜 이 모양인가? 모든 존재와 사물들과 사건들이 철저히 이질성의 상황 속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만남이 있으나 교통이 없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