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명교(정과리)의 문신공방
불투명성의 힘 - 전순영의 「걸어오는 십자가 1」 본문
[작품]
걸어오는 십자가 1
어깨 위에 어깨 올라서고 또 어깨 위에 어깨 올라서고
달빛도 별빛도 못 본 척 흘러만 갔다
돌이 요염한 모란꽃을 피우고
돌이 찬란한 공작새 날개 드리우고
돌이 햇볕을 삼켜버리고
돌이 바닷물을 마셔버리고
돌이 하늘을 다 차지해 버렸다
납작 깔린 입술이 부르르 떨리던 밤이 더욱 먹물로 차올라
길은 화약고가 터지듯이 날아가고......
부러진 어깨들 하나씩 둘씩 보스락보스락
다 차지해 버린 하늘이 뇌 송 벼락 내리치며 쏟아붓는 빗줄기
흙탕물 속에
가랑잎처럼 떠내려가고
개미 떼처럼 발버둥 치며 떠내려가고
하늘은 죽었다고 소리 지르며 떠내려가고
흙은 어디 갔느냐고 울부짖으며 떠내려가고
등에 붙은 위장을 움켜쥐고 떠내려가고
말을 삼켜버린 입술들이 보스락보스락
네 귀퉁이를 휘어잡고 휙 집어 던져버린 하늘이
‘살바도르 달리’ 축 늘어진 시계처럼
[해석]
「걸어오는 십자가 1」는 특이한 시다.
우선 주목할 점 세 가지를 먼저 지적해보자. 하나는 시의 리듬이 통상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기승전결’이라는 통상적인 이야기 리듬이 가리키듯이 대부분은 낮게 시작해서 끌어올리다가 절정에서 빛을 발하고 서서히 하강한다. 그런데 이 시는 절정으로 수직상승하여 절정으로부터의 급격한 추락으로 끝나고 있다. 절정에서 시작하는 시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가령 노래의 경우, 아바의 「댄싱 퀸」은 절정에서 시작하는 전형적인 경우다. 한국시에서도 보기를 들 수 있다.
앞남산 뒷남산 다 버리고
이 골물 저 골물 합수하라
로 시작하는 정희성의 「언제고 한번은 오고야 말」이나 같은 시인의 「답청」의 첫 대목
풀을 밟아라
들녘엔 매 맞은 풀
맞을수륵 시퍼런
봄이 온다 (이상, 정희성, 『저문 강에 삽을 씻고』, 1978)
도 절정으로부터의 리듬을 보여준다. 그러나 절정에 오르자마자 바로 추락하는 광경을 현상한 시를 본 기억은 없다.
다음, ‘어깨’를 수직으로 연결한 것. 어깨의 시학을 선명하게 보여준 시인은 이용악이다. 그에게 어깨는 ‘어깨동무’의 어깨, 즉 수평적 연대의 표상이었다.
오늘도 행길을 동무들의 행렬이 지나는데
뒤 이어 뒤를 이어 물결치는
어깨와 어깨에 빛 빛 찬란한데 (「우리의 거리」)(『이용악 전집』)
그런데 우리의 우승작은 어깨를 위로 쌓는다. ‘애크로뱃’의 어깨다. 그리고 이는 시인이 지금 묘사하는 게 아슬아슬한 곡예를 하다가 추락하는 군상이라는 것을 가리킨다. 어깨를 짚고 올라가다가 균형이 무너지면서 통째로 굴러떨어지는 존재들.
이 시는 구체적으로 어떤 대상을 지목하고 있는 것일까? 그 점이 암시되지 않는 게 이 작품의 약점이다. 물론 시는 ‘은유’, 즉 숨은 비유라서 사실주의적 기술까지 감당할 필요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의 상상력은 그 물질성을 통해서 현실을 환기한다. 그 점에서 보면 ‘돌’은 이미지들의 양상이 매우 역동적임에도 불구하고 불투명하다.
그럼에도 돌의 불투명성은 윗 단락의 물음을 독자에게 자극하는 힘이 있다. 상승의 운동을 감안하면 돌은 지금 쌓아가고 있다. 서커스의 일상적 버전이라고 할 만하다. 그런데 그 돌이 펼치는 동작은 서커스만큼 요란하고 화려하다. 도대체 무엇을 암시하는 거지? 독자는 궁금증에 사로잡힌다. 독자를 궁금하게 하는 것도 시의 능력이다.
세 번째 주목 지점은 제목이다. 독자는 처음에 꽤 어리둥절할 법도 하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풀이에 근거해 보면 제목은 본문 속의 사태에 대한 경고이자 퇴마의식이다. 인간의 수직 욕망에 대해서 십자가는 수평으로 걸어오면서 눈앞에 딱 버티고 선다. “네 본분을 알아라!”라는 주의다.
이 세가지 포인트는 매우 주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서로가 서로를 추동한다. 그 추동력 때문에 독자는 자꾸 질문을 던진다. 우선 “납작깔린 입술”은 이들의 추락이 ‘말’ 때문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몰락의 원인이었던 말을 이 인간들은 여전히 아우성의 방식으로 소비하고 있다. 제 8연의 기능이 그것이다. 그러다가 다음 연에서 입술들이 말을 삼켜버린다. “보스락보스락”은 최후의 꿈틀거림(이건 제 6연에 표지되어 있다)인지, 아니면 숨죽인(기죽은) 모습인지 불분명하지만, 여하튼 저 인간들의 세계의 몰락을 가리킨다. 마지막 연은 ‘하늘’도 덩달어 무너졌음을 보여준다. 당연하다. 군상이 섬기는 하늘은 군상의 하늘이니까. 그 하늘을 그들은 절대적이라고 믿지만 상대적인 것일 뿐이다. 십자가의 기능은 그 십자의 형상으로 그 문제를 일깨우려 한다. (『현대시학』 621호, 2024년 9-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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