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윤동주 (8)
정명교(정과리)의 문신공방
윤동주 탄생 100년이 되는 해이다. 시인이 1945년 2월 일본의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사망하고 같은 해 8월에 조선이 광복을 맞이한 이후, 윤동주는 한국인들이 가장 아끼는 시인으로 자리잡아 왔다. 연희 전문 동기 강처중과 후배 정병욱이 그의 유품과 유고를 보관하여 후세에 전달함으로써 그를 보듬는 마음이 물질적 상관물을 확보하여 오래 지속하고 발전할 수 있었다. 특히 정병욱의 유고 보관의 사연이 극적이어서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다. 잘 알다시피 윤동주는 독립운동을 한 혐의로 체포된 내력에 생체 실험을 당했다는 짐작이 얹혀 일제에 의한 민족적 수난의 상징이 되었다. 윤동주의 불운한 생애는 곧바로 한국인의 기구한 운명과 하나로 맞물렸다. 게다가 그의 시들은 한결같이 진솔한 구도의 심정을 담아 자주 독립을 향한..
어제(2023.02.02.) 연세대학교에서 무슨 행사(GEEF)가 있어서, 윤동주에 대해서 발표를 하게 되었다. 그런데 같은 세션에 김형석 선생도 연사로 오셨다. 발표가 시작되기 전에 잠시 한담을 나눌 시간이 있었다. 그 자리에서 들은 얘기다. 김형석 선생은 윤동주 시인보다 세 살 연하이지만 평양 숭실중학교 동기동창이시다. 당시(1936년 3월) 일제의 신사참배 요구에 불응하다가 학교가 존폐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나? 그해에 학교는 유지되었다. 다만 윤동주와 김형석 두 분은 학교를 그만 두었다. 둘은 서로에게 물었다고 한다. “어떻게 할 건가?” 윤동주는 “나는 만주로 돌아가면 된다. 그만 두겠다.” 평양 사람인 김형석도 그만 두었다. 김형석 선생의 회고에 의하면, 당시 학교를 자퇴한..

윤동주 기념관(핀슨홀)이 새로 개관한 지 벌써 몇 달이 지났다.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개관이 늦어졌으나, 이제 미리 예약하고 방문할 수 있다고 한다. 기념관을 개관할 당시에 윤동주에 대해 몇 마디 한 게 유튜브에 등록이 되어서, 관심이 있는 분들을 위해 링크를 소개하고자 한다. https://www.youtube.com/watch?v=0FzGmJHt7Lw 이 난에 쓰인 사진 하나는, 윤동주가 도일하기 전에 후배 정병욱에게 맡겼던(그리고 정병욱이 고향집의 마루장 밑에 독을 파고 감추어서 해방 후 빛을 볼 수 있었던) 자필 수고본의 표제 부분이며, 다른 하나는 윤동주 기념관을 비스듬히 찍은 것이다. 이 사진들은 윤동주 기념관 개관 기념으로 '윤동주 기념 사업회'에서 만든 위 자필 수고본의 인쇄본 「하늘과..

‘진실’이라는 단어를 처처에 박아 놓은 어떤 책을 읽다가 “김수영은 혁명은 안 되고 당만 바꿨다고 개탄했”다는 구절을 읽고 기가 막혔다. 김수영은 “방만 바꾸어 버렸다”고 말했지, ‘당’을 바꾸었다고 하지 않았다. 왜 이런 오류가 일어났는가? 기억의 착오일 수도 있겠으나, 김수영의 시를 실제 읽지 않아서 벌어진 일이라면, 다시 한번 한국 지식인들의 얄팍함을 ‘개탄’하게 할만한 일이다(김수영을 읽은 사람이라면 그가 그런 말을 하리라는 걸 상상할 수 있겠는가?). 아주 오래전 일이지만 이런 일도 있었다. 어느 고위 관료가 은퇴를 하면서 TV에서 지나온 시절에 대해 인터뷰를 했다. 그 안에 ‘내 인생의 화두’라는 항목이 있었다. 고위 관료가 빈 칸에 ‘윤동주’를 적고는 윤동주의 시 한편을 들었다. TV 화면에..
작년은 윤동주 순사 70주년이었고 내년은 윤동주 탄생 100주년이다. 시기가 무르익어서인지 윤동주에 대한 사람들의 이해도 한 단계 도약하는 듯하다. 예전에 윤동주를 둘러 싼 해묵은 논쟁은 그의 시를 순수시로 볼 것인가, 저항시로 볼 것인가에 대한 시시비비였다. 그가 독립운동을 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옥사했다는 점에 주목한 사람들은 그를 ‘저항시인’으로 규정하였고, 섬세한 내면에 주목한 사람들은 그를 순수시인으로 보았다. 그의 시에는 분명 피식민지인의 고뇌와 현실에 대한 비판적 인식이 내재되어 있었다. 「십자가」,「쉽게 씌어진 시」는 그러한 심경을 아슬아슬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대체로 그런 생각들을 직정적으로 표출하지 않고 자신의 내면 수양이라는 문제로 치환하였다. 그래서 그의 시에는 분노의 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