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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명교(정과리)의 문신공방

※ 아래 글은 '동인문학상' 제 55회 아홉번째 독회에 대한 결과로서의 독회평이다. 조선일보 홈페이지에서도 읽을 수 있다. 신문사의 양해를 얻어 블로그에 올린다.위수정의 『우리에게 없는 밤』(문학과지성사, 2004.07)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거의 대부분 현실의 흐름에 느슨하게 끌려가는 존재들이다. 그들의 움직임에는 감정적인 흥분도 보이고 지적인 호기심도 읽히고, 스스로 이행하는 의지도 느껴진다. 그러나 그것들은 격렬하지 않고 매우 조용해서 독자가 의식하고 읽을 때에만 감지할 수 있다. 또한 각 인물들의 행동에는 저마다의 행렬이 있다. 그들 사이에는 사연의 공통점이 보이지 않는다. 이는 현대인들의 총체적 고립상을 보여주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물들의 삶 밑바닥을 관류하는 공통의 느낌..

※ 아래 글은 '동인문학상' 제 55회 아홉번째 독회에 대한 결과로서의 독회평이다. 조선일보 홈페이지에서도 읽을 수 있다. 신문사의 양해를 얻어 블로그에 올린다.강정아의 『책방, 나라 사랑』(강, 2024.07)에서 가장 눈에 띄는 특성은 문체의 투명성이다. 가령 이런 대목을 보자. 언니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언니는 그 대학에서 제일 예쁘고 인기 있는 여학생이었다. 만나는 모든 남자들이 언니를 보기만 하면 반했다. (p.31) 이 짧은 두 문장은 문장과 의미가 그대로 일치한다. 어떤 암시도, 숨은 의미도, 내포도, 비유도 없다. 다른 작가의 작품과 비교해 보자. 아이는 소녀와 함께 있으면서 그 맑은 눈과 건강한 볼과 머리카락 향기에 온전히 홀린 마음으로 그네를 바라보기만 하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소녀 ..

※ 아래 글은 '동인문학상' 제 55회 여덟 번째 독회에 대한 결과로서의 독회평이다. 조선일보 홈페이지에서도 읽을 수 있다. 신문사의 양해를 얻어 블로그에 올린다.로뎅의 「생각하는 사람le penseur」을 로봇에게서 만나는 건 곤혹스런 느낌을 준다. 잘 알다시피 저 유명한 조각가의 ‘생각인’은 ‘지옥의 문’(단테) 앞에서 고뇌에 빠져 있다. 임수현의 『퇴역로봇』(문학수첩, 2024.06)이 전해주는 우리의 ‘생각봇’, ‘제로원’은 DMZ 안에 버려진 채 끊임없이 생각의 더듬이를 옮기는 일에 빠져 있다. 그는 본래 전투용으로 개발되었으나 전쟁이 기획상품이 되어버린 시대에 할 일을 잃고, 탐사로봇으로 살다가 마침내 퇴역당하고 만다. 우선 이 로봇이 가상적으로 AI의 미래를 그린다는 점을 가외로 짚고 넘어가..

※ 아래 글은 '동인문학상' 제 55회 여덟 번째 독회에 대한 결과로서의 독회평이다. 조선일보 홈페이지에서도 읽을 수 있다. 신문사의 양해를 얻어 블로그에 올린다. 듀나의 짧은 단편들이 주는 매력은 미니멀한 사건이 윙크하듯이 띄우는 미묘한 암시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 암시들은 정말 미묘(微妙)한데, 그것은 독자를 거듭해서 해석의 두 갈래 길 앞에 놓기 때문이다. 가령 이번 소설집, 『찢어진 종이조각의 신』(단비, 2024.06)의 첫 작품, 「가거라, 작은 책이여」는 유명한 문학작품들에 대한 독서경험을 제공하는 ‘책읽어주는 아무개’류의 ‘사이파이Syfy’ 버전을 대상으로 하고 있는 소설로서, 정작 문제가 되는 것은 정보취득으로 전락한 독서(경험)가 아니라, 그것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과 그 가족들의 자..

※ 아래 글은 '동인문학상' 제 55회 일곱 번째 독회에 대한 결과로서의 독회평이다. 조선일보 홈페이지에서도 읽을 수 있다. 신문사의 양해를 얻어 블로그에 올린다.한국소설이 개인들의 사생활을 소비해온 지 꽤 시간이 흘렀다. 이러한 소설적 경향의 득세가 소설에만 국한된 건 아니다. 이는 세계적인 문화 추세의 한 단면을 반영할 뿐이다. 그것은 모든 것을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생각하는 개인주의의 첨예화로서 ‘자기애’의 보편적 확산 현상을 가리킨다. 오늘날 대중 스타들은 자기애를 공공연하게 표방하고 그것을 하나의 사상으로까지 끌어올리는 데서 팬들의 공감을 블루베리를 따 담듯 수확하고 있다. ‘방탄소년단’이 유엔 연설(2017)에서 “진정한 사랑은 나 자신을 사랑하는 것에서 시작한다”고 발언하고 미국의 팝스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