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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명교(정과리)의 문신공방
김지하가 해월과 증산에게서 전거를 끌어내며 ‘생명사상’을 제기했을 때, 그것은 순간적으로 비상한 관심을 촉발시켰다가, 비과학적이고 신비주의적이라는 이론가들의 비판과 함게 차츰 그 광도를 잃어왔다. 하지만 논의가 부정적인 쪽으로 기우는 도중에도 그것은 문학적 실천의 장에 은근하고 깊숙이 스며들어간 모양이다. 많은 작가·시인들이 의식적으로 ‘생명’을 화두로 삼는 경우를 여러번 목격할 수 있다. 이시영의 세 번째 시집 『길은 멀다 친구여』(실천문학사, 1994)의 시편들을 붙들어 매고 있는 주제 단위도 생명이다. 그러나 그의 생명은 김지하의 생명과 다르며, 혹은 60년대의 생명주의 문학(박상륭·이세방)의 생명과도 다르다. 그 다름은 그것이 죽음과 맺고 있는 특이한 관계에서 뚜렷이 나타난다. 김지하의 생명이 죽..
※ '문심공방 둘'에 실린 글들을 올리고 있는 중이다. 씌어진 년도를 유념하고 읽어주시기를 바란다. 시가 다시 살아나고 있다. 80년대에 절정을 맛보았던 시는 한동안 사소한 음향으로 잦아드는 듯 싶었다. 시는 화살과 같은 것이어서, 핵심에서, 언제나 핵심에서만 놀려고 한다. 그러니, 중심이 와해된 시대에 시가 덩달아 허물어져내리는 것은 예정된 운명같은 것일 수도 있다. 물론 시가 아주 사라진 것은 아니다. 사라지기는 커녕 시는 시방 대량생산 중이다. 그러나, 시에 기생해 성장했던 온갖 문화적 원소들, 감성, 이미지, 리듬, 기지 들이 문자의 딱딱한 껍질을 뚫고 나가, ‘직접성’의 이름으로 정의할 수 있는 현란한 새 문화 체제들을 이루게 되면서, 시는 오직 문자의 시원만을 재산으로 갖게 되었다. 성(聖)..
이 달에 발표된 이성복과 유병근(劉秉根)의 시들(『문학사상』, 『한국문학』)이 흥미롭다. 이 시들은 한국문학의 오래된 주제 중의 하나인 ‘한(恨)’의 문제에 새롭게 접근한다. 우리에게 ‘한’을 노래한 시들이 유달리 많았다는 것은, 혹은 그런 시들이 애송된다는 것은 우리에게 잃어버린 것, 빼앗긴 것, 헤어진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 잃음과 박탈과 이별이 느닷없고 부당하며 납득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한국의 근·현대사는 그 잃음·박탈·이별을 야기한 사건들로 점철되어 있다. 그리고 그것들의 ‘장기지속’은 한국인의 집단무의식 속에 넓고 깊게 스며들어 ‘한’이라는 독특한 심리구조를 형성하였다. 시인들은 끊임없이 그 한을 시로 노래해 해원과 회복을 꿈구어 왔다. 행동가들은 죽음을 불사하며 그것..
우리는 대체로 네 겹의 생각 속에서 살고 있다. 맨 바깥에 감정 그 자체인 생각이 있다. 그 아래엔 논리화된 생각이 있다. 더 깊은 곳엔 반성적 성찰이 움직이면서, 논리가 품고 있는 이기심을 풀어 헤쳐 보다 많은 사람들이 동의할 수 있도록 생각의 피륙을 짠다. 그러나 때로 이 성찰이 크레인의 쇠공처럼 난폭해지는 순간이 있다. “사랑하라, 무조건 사랑하라” 같은 명령은 사랑의 예외적 가치에 근거하고 있으나 그것을 이해하지 못한 사람의 몸속에서는 광란을 유발할 수도 있다. 이성복 산문의 생각은 그 아래에서 움직인다. 반성적 사유가 절대적 명제로 굳어버리는 걸 경계하고 그것이 본래 질문이라는 것을 환기시키면서, 그것이 스스로 대답을 찾아가는 과정 속에 독자를 동참시킨다. 우리는 이러한 사고의 움직임을 근본성의..
우리는 일반적으로 정서적 압축을 통해 삶에 대한 이해와 느낌을 순수한 언어의 결정(結晶)으로 빚어낸 것을 시라고 배워 왔다. 시에서 통일된 이미지를 사람들이 기대하는 건 이로부터 비롯된다. 이성복의 시가 1980년대 초엽에 처음 발표되었을 때, 독자들은 그러한 기대가 철저하게 무너진 것을 보고 경악한다. 거기에 “잘 빚어진 항아리”(Cleanth Brooks)는 없었고, 찢기고 파편화된 이미지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 이미지들은 조각났지만 선명했고 알쏭달쏭하지만 강렬한 정서적 울림을 가지고 있었다. 이성복 시의 이 형태적 반란의 배경에는 1980년을 전후해 한국사회의 내부에서 들끓는 모순들의 첨예한 충돌이 놓여 있었다. 한편으로 한국사회는 제 3공화국의 경제근대화 정책이 효과를 얻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