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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명교(정과리)의 문신공방

※ 아래 글은 제54회 (2023년) 동인문학상 첫 번째 독회에서 후보작으로 선정된 글에 대한 지면용 심사평이다. 조선일보 홈페이지에서도 읽을 수 있다. 신문사의 양해를 얻어 블로그에 싣는다. 신종원의 『습지장례법』(문학과지성사, 2022.08)은 유령의 집으로 독자를 초대한다. 책을 펼치면 엽기 장례를 치르는 광경이 격하게 묘사된다. 뭐가 엽기란 말인가? 잘 알다시피 문학에 비유법이란 게 있다. 장미로 미인을 비유하고, 주가 급등을 쇠뿔로 비유한다. 여기에서는 분묘를 늪지에 비유했다. 비유는 장식이 아니다. 원본을 변화시키는 힘이다. 늪지에 비유했더니 무시무시한 일이 일어난다. 가문의 모든 조상들이 저승에 들어가지 못하고 늪에 빠져 죽은 시체로 켜켜이 쌓여 있는 것이다. 온전히 삭지 못한 채로 너덜너덜..

✍ 〈이름〉 의 첫번째 글자가 발음되었다. (보르헤스, 「죽음과 나침반」, 『보르헤스 전집 - 2. 픽션들』, 황병하역, 민음사, 1994, p.214) ✍ 감상(感想)을 사유(思惟)라고 적은 글들이 차고도 넘친다. 마음 심(心)자가 글자마다 붙어 있어서 그런가 보다. 그런 분들에게 ‘사유’ 대신에 ‘생각(生覺)’으로 단어를 고쳐보길 권한다. 그러면 지금 뇌에 전달된 정보가 feeling인지 thinking인지 좀 더 명료해질 거라고 확신한다. ✍ 전설이 된 이상(李箱, 1910~1937) 선생이 그 역시 전설이 된 소설 「날개」에서 괴리씨에게 물었다. 아니, 괴리씨는 그렇게 물었다고 환청으로 들었다.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를 아시오?” 괴리씨가 대답했다. “당신 말고는 아주 드물게 보았지요. 한국..
김영랑의 「모란이 피기까지는」을 읽어 보자.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즉 나의봄을 기둘리고 있을태요 모란이 뚝뚝 떠러져버린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흰 서름에 잠길테요 五月어느날 그하로 무덥든 날 떠러져 누은 꽂닢마져 시드러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최도 없어지고 뻐처오르든 내보람 서운케 문허졌느니 모란이 지고말면 그뿐 내 한해는 다 가고말아 三百예순날 하냥 섭섭해 우옵내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즉 기둘리고있을테요 찰란한 슬픔의 봄을1) (1934.4) 이 시 앞에서 해석은 거듭 붓방망이질을 한다. 이상하게도 여러 뜻으로 읽힌다. 좋은 시의 기본 자질이 ‘모호성’에 있다는 것은 아주 오래전부터 교과서에 실린 얘기다. 그 뜻을 제대로 파악하고 제대로 전달한 교사가, 아니 평론가가 드물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
자기를 알고자 하는 마음의 행려는 굽이가 많더라 - 이상의 「거울」을 중심으로 지난 호에, 자아의 인식은 타자의 인식과 동시적이며, 자아와 타자 사이에는 자유의 충돌이 있다고 말했다. 그렇기 때문에 타자는 일방적으로 전유되지도 않으며 타자에게 맹목적으로 의존할 수도 없다. 타자의 근본적 특성은 ‘낯설음’이다. 이 낯설음을 잊을 때 이상한 착각과 환상에 빠지게 된다. 서정시를 “세계의 자아화”로 규정해 온 거의 반세기 동안의 관행도 그 착각과 환상에 해당한다. 이 문제를 차근차근히 살펴보자(지난 호에는 원문 그대로 인용했다가 조판상의 문제가 발생하였다. 이번부터는 현대표준어로 변형한 형태로 읽어 보겠다.) 거울속에는소리가없소 저렇게까지조용한세상은참없을것이오 거울속에도내게귀가있소 내말을못알아듣는딱한귀가두개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