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단장 (11)
정명교(정과리)의 문신공방

✍ 최근에 발간된 어떤 잡지의 표지에 “미국 분열 이후의 세계, 어떻게 대응할까”라는 글귀가 특집 제목으로 실려 있다. 무슨 말인가 궁금해서 서문을 뒤졌더니, “이번호 특집은 미국의 심각한 분열과 미중 간의 치열한 전략경쟁으로 말미암은 세계질서의 변동 양상을 진단하고 이에 걸맞은 우리의 대응 방향을 탐색하는 글들로 꾸렸다”라고 쓰고 있다. 이 설명은 궁금증을 더 키운다. “미국의 심각한 분열”? 트럼프 전 대통령을 둘러싼 일련의 해프닝을 가리키는 것인가? 아니면 미국에서 ‘남북전쟁’이 재발했나? 아니면 그랬으면 하는 소망의 ‘촌철살인적’ 표현인가? ✍ 악수신기전(惡手神機箭) 괴리씨는 바둑을 모르지만, “장고 끝에 악수”라는 말은 많이 들어서 기억하고 있다. 최근의 어느 장소에서는 장고라기보다는 수를 낼 ..

✍ 〈이름〉 의 첫번째 글자가 발음되었다. (보르헤스, 「죽음과 나침반」, 『보르헤스 전집 - 2. 픽션들』, 황병하역, 민음사, 1994, p.214) ✍ 감상(感想)을 사유(思惟)라고 적은 글들이 차고도 넘친다. 마음 심(心)자가 글자마다 붙어 있어서 그런가 보다. 그런 분들에게 ‘사유’ 대신에 ‘생각(生覺)’으로 단어를 고쳐보길 권한다. 그러면 지금 뇌에 전달된 정보가 feeling인지 thinking인지 좀 더 명료해질 거라고 확신한다. ✍ 전설이 된 이상(李箱, 1910~1937) 선생이 그 역시 전설이 된 소설 「날개」에서 괴리씨에게 물었다. 아니, 괴리씨는 그렇게 물었다고 환청으로 들었다.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를 아시오?” 괴리씨가 대답했다. “당신 말고는 아주 드물게 보았지요. 한국..

✍ 새해가 밝았다. 눈도 많이 왔다. 불행하게도 이 눈은 바둑이의 눈도 아니고 김수영의 눈도 아니다. 『설국』은 아예 목구멍 밑에 쭈그리고 앉아 감히 나올 엄두를 못낸다. 굳이 비유를 하자면 이 눈은 솔제니친의 『수용소군도』에서 지나치리만치 요약적으로 묘사된, 변덕스런 어느 봄날의, “적대적인 회오리 바람이 검은 구름장으로부터 회백질의 눈발들을 뿜어내어, 수인들의 얼굴과, 등, 다리 등을 가리지 않고 마구 회초리질 하면서, 외투와 양말을 선득한 축축함으로 젖게 하던”(Alexandre Soljénitsyne, L'archipel du Goulag 1 - tome 4 des œuvres complètes, Paris: Fayard, 1973, epub verseion) 그런 눈, 아무런 까닭도 목표도 비치..

✍ 너무나 유명해서 주를 달 필요가 없는 역사에 관한 마르크스의 말이 있다.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의 첫 문단이다. 헤겔은 어디에선가 모든 큰 사건들과 역사적 인물들은 두 번 되풀이 된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그가 빠뜨린 게 하나 있으니, 처음엔 비극이 되고 두 번째는 희극이 된다는 점이다. 지금 그 두 번째 사이클이 한국에서 돌아가는 모양이다. 악착같은 괴성들이 무더운 여름의 매미소리처럼 극성스러우나 멀찌감치의 해먹에서 들으니 비 온 후 논밭과 산자락에서의 맹꽁이들의 울음소리나 그것들이나 은은히 멀어지는 기적소리처럼 들려서 미소가 조는 자의 입가에 슬그머니 번진다. 그러다가 바로 얼굴이 굳어진다. 문제는 희극은 만족을 유발해야 마땅한데, 그러나, 웃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마르..

✍ 한국학 전공인 외국인 교수가 내게 묻는다. “왜 문학 논문들에서 김현 교수가 인용되지 않지요?” 나는 대답한다. “인용도 연구자집단 카르텔의 원칙에 따라 운용되고 있기 때문이랍니다. 김현 교수에게 눈도장 찍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는 거지요. 그래서 문학평론가 김현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나오고 있지만, 이런저런 문학 논문에서 김현 선생의 글이 인용되는 일은 흔치 않지요. 비 국문과 출신의 다른 문학평론가들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구요. 그리고 잘 보세요. 인용된 글에 대한 비판적 언급은 좀처럼 없어요. ‘눈도장’의 원리에 위반되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그걸 기억하는 ‘눈동자’들은 있을 수밖에 없어요. 시선은 화인(火印)과 같은 거에요. 쌍방으로요. 훗날 누군가는 포렌식할 겁니다. 데이터는 빅빅 커질 것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