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명교(정과리)의 문신공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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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진욱의 「리얼리즘」

비평쟁이 괴리 2011. 11. 23. 12:01

아감벤Giorgio Agamben표정이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표정의 나타남은 언어 자체의 나타남이다. 따라서 그것은 어떠한 실제적인 내용도 가지고 있지 않다. 인간 혹은 세계의 이런 저런 모습에 대한 진실을 말하지도 않는다. 그것은 그저 열림일 뿐인 것이다. 소통가능성일 뿐이다. 표정의 빛 안으로 걸어들어간다는 것은 이 열림으로서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견딘다는 것을 의미한다. / 그렇게 표정은 무엇보다도 나타남의 열정passion’, 언어의 열정이다. 자연은 그가 언어에 의해 드러나는 것을 감지하는 순간 표정을 획득한다.(아감벤, 표정Le Visage, 목적 없는 수단들 정치에 대한 노트 Moyens sans fins Notes sur la politique, Rivages/Poches, 2002, p.104.)

 

처음 읽었을 때 아감벤다운 예리함에 한 번 감탄하고는 슬그머니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지난 토요일 최진욱의 전시회, 리얼리즘(일민미술관, 2011.10.13.~11.27)을 관람하던 중에 그 대목이 다시 떠올랐다. 웃음(oil on canvas, 53x54cm, 2009-2011)이라는 작은 그림을 보았을 때였다. 두 친구가 어깨동무를 하고 뛰어 오르는 장면을 그린 것으로, 분명 그들은 거기에서 웃으며 솟구치고 있었다. 웃고 있었다? 무심코 지나치려다가 문득 이상한 느낌이 들어 다시 그림으로 돌아가 보았다. 그랬더니, 두 친구는 웃고 있는 것 같지가 않았다. 해독하기가 어려운 아주 이상한 표정이었다. 바보가 입 벌린 것 같기도 했고, 어지러움에 혼이 나간 듯하기도 했고, 무엇보다도 허수아비처럼 공중에 멈춰 있었다. 한참 들여다보다가 이런 모호한 표정의 까닭을 짐작할 수 있었다. 얼굴에서 벌린 입만 선명히 표현되어 있을 뿐 나머지 부분들은 뭉개져 있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아감벤의 생각을 빌리자면 여기엔 언어체계의 결락이 있는 것이고, 그래서 표정이 열리다 만 것이었다. 열리다 말고 거기에서 멈춰버린 것이었다. 지금 두 친구는 위로 솟아오르고 있다기보다는 차라리 허공중에서 무언가에 붙들려 있는 꼴이었다.

최진욱의 다른 그림들을 마저 보니, 화가가 이 소통가능성으로서의 표정을 능숙하게 다루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가령, 남매 혹은 두 연인이 걸어 내려가는 듯한 서울의 서족에선 아주 작은 얼굴이지만 윤곽이 살아 있어, 대화를 나누며 걸어가고 있는 모습을 잘 전달하고 있었다. 반면, 네 명의 여학생이 걸어 올라가고 있는 북아현동3에는 세 학생이 뒤통수만 보이고 앞장을 선 키 큰 학생의 얼굴이 뭉개져 있었는데, 그 뭉개진 얼굴 때문인지 차로에서 길을 건너다 말고, 정지해 버린 듯한 느낌을 주었다. 다른 한편, 한국관광객들 임시 정부 앞에서 허둥대다연작에서는 임시정부 앞에 서 있는 한 중국인의 얼굴이 뭉개져 있었는데, 그가 공안요원인지 혹은 장사치인지 또는 건달인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그 뭉개진 얼굴로 관광객들을 감시하거나 무언가를 요구하고 있었다. 요컨대 그 중국인은 그림 속에서 움직이는 존재가 아니라 요지부동의 한 지점에서(규율과 통제의 장소라고 짐작할 수 있는) 감시하고 명령하는 존재라고 할 수 있었다.

이렇게 인물의 얼굴을 뭉개는 방법은 자화상(oil on canvas, 100x85cm, 1982)에선 다른 방식으로 변용되어 꽤 독특한 이미지를 빚어내고 있었다. 여기에서 표정은 오히려 살아 있었는데, 그 대신 몸 전체가 몇 겹으로 겹쳐져 있었다. 앞으로 쭉 내민 왼쪽 손에 붓인지 필기구를 들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앞에 있는 건 캔버스를 표상하는 것으로 보였다. 그런데 이 캔버스 앞에서 인물은 약간 앞면 쪽으로 얼굴을 튼 상태에서, 몸의 윤곽이 풀어지면서 배경 속으로 흘러들고 있었고, 특히 뒷부분의 머리통은 배경의 어둠으로 잠기고 등은 뒤로 잇달아 자신의 흔적을 남기고 있었다. 그래서 이 모습은 마치 앞으로 움직이고 있는데, 그러나 어떤 제재 혹은 기척 때문에 약간 놀란 표정을 보이며 옆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지금 그림 속의 인물이 그림을 그리고 있는 중이라는 점에 유의하면, 그림 속의 화가는 그림을 그리고 있다기보다는 그림 속으로 진입하고 있는 중이라고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 진입을 선명히 표시하고 있는 것이 앞으로 쭉 내민 왼팔이다. 그리고 아마도 이것은 화가 최진욱의 미술관을 암시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는 그림을 그린다기보다 그림 속으로 들어가는 존재이다. 뒤에 잔영을 남기는 것으로 보아, 매우 몰입적으로. 또한 그 진입은 배경 속에 자신의 윤곽을 풀어내면서 이루어지고 있다. 다시 말해 그가 진입하면서 그림 안으로 텔레포팅될 때, 그의 존재는 본래의 자신과 배경(상황)이 합성된 존재로 변신한다.

그런데 실제 그림은 그러한 미술관의 이행이 무언가에 제동이 걸린 것으로 표현되고 있다. 그 무언가는 세상의 몰이해일까? 혹은 권력기관의 검열일까? 아니면 동료 미술가들이나 미술평론가들의 비판? 그 무엇이든 자화상 속의 이 그림은 얼굴로 놀라고 몸으로 매우 고통스럽다. 그래서 잔영들의 겹쳐 놓임이 아주 빠른 속도의 움직임을 표현하지 않고, 멈춤 혹은 정지당함을 암시하고 있다. 이로써 그는 자신이 추구하는 방법을 원하는 만큼 구현하면서 동시에 그 방법의 어려움과 고통을 환기시킨다.

그가 인물과 배경 사이의 경계를 허물어뜨리는 것은 방금 말했듯, 상황과 합쳐지는 방식으로 앞으로 전진하고자 하는 지향성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그의 배경만을 따로 눈여겨보는 것도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그가 그린 배경들은 아주 법석이고 무성하고 넘쳐난다. 끊임없이 무언가가 보태지고 있기 때문이다. 무언가가? 바로 배경 속을 뚫고 지나가는 존재들의 운동이. 그 풀어지면서 변신하는 존재의 운동을 통해 배경도 덩달아 움직이면서 변화하고 있는 중이다. 아니, 존재들이 꼭 그림 속에 나타나야 할 이유는 없다. 그게 화가의 세계관이라면, 세계는 어떤 상황에서도 스스로 그렇게 합성과 분열을 되풀이 하며 스스로 변하고 있는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 점에서 나의 생명(acrylic on canvas, 200x200cm, 2004)은 평범한 숲의 한 부분을 그린 것인데,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기보다는 진실하다고 말할 수 있는 그림이다. 왜냐하면 예쁜 꽃은 하나도 등장하지 않지만, 모든 세목들이, 꽃이파리에서부터 여린 이름모를 풀나무들이 이리저리 뒤섞인 분포의 모양까지, 하나하나가 저마다 살아서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무성히 움직이는 은밀한 광경 속에 왼쪽 옆으로 비쭉이 세워져 있는 고동색 기둥과 저 멀리 보이는 하얀 벤취 만이 멈춰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이 숨은 수런거림과 저 기묘한 대비(또한 기둥은 뚜렷하고 벤취는 은밀하다)가 관람자에게 여러 생각을 동시병발적으로 통째로 또한 반복적으로 일으킨다.(2011.1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