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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문학지망생들에게 보내는 글

비평쟁이 괴리 2012. 4. 26. 14:23

연세대학교 문학특기자들의 문집 과도한 스타일2011년판이 출간되었다. 거기에 쓴 발문이다.

 

당신의 적이 당신을 편들 정도로까지 성공합시다.

 

 

해마다 치르는 이 발문(跋文)의 지신밟기를 시작하면서 새삼 여러분을 처음 만났던 때의 감회가 떠오릅니다. 여러분은 세상의 모든 가능한 꽃을 내장한 푸른 싹 같았습니다. 동시에 험한 세파를 떠올리면 어떤 망울이 여러분의 몸으로부터 솟아나든 무난히 개화하리라고 기대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 사이엔 문학에 대한 여러분 자신의 노력뿐만이 아니라 세상과 여러분 사이의 온갖 상호작용이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그 상호작용에 대한 이해를 어렵게 하는 건 무엇보다도 문학이란 특정한 때와 장소에서 확정된 가치를 부여받을 수가 없다는 현대 예술의 본질과 근본적인 차원에서 맞닿아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어떤 문학 작품의 가치는 누구의 권위에도, 어떤 무서운 규범에도 소속될 수 없기 때문이며, 또한 그 가치 스스로 미래의 독자들과의 만남을 통해 끊임없이 변화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러한 속성 때문에 문학 작품을 판단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세속적으로는 엉뚱한 변수들이 너무나 많이 그것의 판단에 끼어들어 문학작품의 가치를 호도하는 경우가 번다합니다. 바르가스 요사의 말을 빌리자면, “자격이 있는 작가들은 완강하게 거부하면서도 자격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집요하게 몰려드는”(젊은 소설가에게 보내는 편지, 김현철 역, 새물결, 2005) 그런 것들이 말입니다.

성실하게 문학의 길을 걸어 본 많은 작가들은, 그가 세속적으로 성공했든 못했든, 문학하기의 그런 얄궂은 운명을 잘 겪어 알고 있습니다. 바르가스 요사는 그래서 이렇게 권유합니다. “반드시 성공할 것이라고 자신하지 마십시오.” “글쓰기의 결과로 얻을 수 있는 모든 것과는 상관없이 글쓰기 그 자체를 최고의 보상물로 생각해야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바르가스 요사의 이 말에는 문학이 후대의 독자들에 의해 그 의미를 끊임없이 변화하게 된다는 사실에 대한 고려는 없습니다만, 그런 고려를 하더라도, 그의 말은 역설적이게도 진실하게 들립니다. 왜냐하면 후대의 독자라는 어떤 이상적인 독자를 가정하는 것은, 그 자체로서, 현재의 글쓰기의 헌신에 대한 순수한 대답을 그들에게서 받을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 깔려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미래에 있을 어떤 세속적인 변수들을 가정하는 것은, 인간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계산해 낼 수 없는 결과에 대한 예측을 요구하는 것이거나, 아니면 오늘날의 세속적 현상들이 이미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 충분히 짐작할 수 있기 때문에 전혀 불요한 것이거나 할 것입니다.

그러니 나는 여전히 여러분들에게 오로지 전심과 진심으로 쓰는 데 매진하라고 충고하고 싶어집니다. 메아리 같은 건 기대하지 말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을 각오한다는 건 얼마나 고달프고 어려운 일입니까? 마치 여러분에게 보이지 않는 언어의 감옥 속으로 걸어들어가라고 부추기는 것 같아 마음이 무겁습니다.

그러나 달리 무슨 방법이 있겠습니까? 그러니 보들레르가 문학청년들에게 주는 충고(보들레르의 수첩, 이건수역, 문학과지성사, 2011)에서 했던 충고를 꺼내봅니다. 통속작가의 성공을 비난하기보다는 그가 자신의 장르 안에서 보여준 재능을 당신은 스스로 속하기를 원하는 문학 장르 속에서 보여줄 것을 결심하라고 말입니다. 더 나아가 부르주아들이 당신 편을 들 정도로까지 승리하리라는 희망을 가지라고 말입니다. 그는 이어서 덧붙이는군요. “왜냐하면 능력이 지고의 정의라는 사실만이 언제나 진리이니까.” 이 말을 곧이곧대로 들으면 우리는 너무나 괴로운 바보로 영원히 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이런 능청이 우리의 정신을 푸른 지평선 앞에 데려다 줍니다. 이런 생각은 우리를 매우 건강하게 오연하게 합니다. 적어도 불운을 탓하고 불우에 슬퍼하지는 않게 해줍니다.

여러분의 오늘의 글들이 그렇게 의젓한 포즈를 취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장래에도 그것을 잃지 말기 바랍니다. (2011.12.1.)

 

첨언: 뒷부분의 보들레르의 충고는 내가 이미 한 번 인용한 바가 있다. 내가 왜 이 말에 자꾸 끌리는지, 그것도 흥미로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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