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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피아 미술관에서의 레이몽 루셀

비평쟁이 괴리 2012. 1. 29. 12:38

마드리드의 소피아 미술관(Museo nacional centro de arte Reina Sofía)’에 간 건 지난 해 1215일이다. 이 미술관의 큐레이터들로 보이는 Manuel J. Borja-Ville, Jésus Carrillo, Rosario Peiró가 만든 뮤제오 나시오날 센트로 데 아르테 콜렉션을 읽는 열쇠, 1(2010)[2부는 아직 출간되지 않은 듯하다]에 의하면, ‘현대예술을 전시하고 있는 이 미술관은 출발할 때부터 역사의 문제적 성격을 전면에 내세운다는 취지를 갖고 있었다. 다만, 그 역사에 대해 확정된 의미를 부여하려는 의도는 거부하면서. 그렇게 해서, “이 미술관에 대한 체험은 무엇보다도 차이와 불연속에 대한 체험, 즉 현재와 과거 사이에 명백하고 뚜렷하고 확고한 연결선이 존재한다고 믿으려 하는 세계에 대한 경직된 지배적 이미지를 뒤흔드는 체험이어야 한다”(pp.9~10)고 그들은 적고 있다.

나는 무엇보다도 게르니카를 보고 싶어서 마드리드에 도착한 다음 날 바로 그곳으로 달려 갔으나, 그림을 보기 위해 2층에 올라가기 전 둘러 본 1층에서는 마침 레이몽 루셀Raymond Roussel에 관한 특별전시회(Locus Solus, Impressiones de Raymond Roussel, 2011.10.16.-2012.02.27.)를 열고 있었다. 전시 취지문을 보자니, “레이몽 루셀이 현대 예술에 끼친 영향을 분석하기 위해서, 대략 서른 명의 다른 예술가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다양한 유형의 예술작품들(회화, 사진, 조각, 레디-메이드, 설치, 비디오)을 광범위하게 살피는작업이라고 적혀 있다. 과연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 살바도르 달리Salvador Dali, 프란시스 피카비아Francis Picabia, 앨런 루퍼스버그Allen Ruppersberg, 로드니 그래험Rodney Graham, 미셀 푸코Michel Foucault, 존 애쉬베리John Ashbery, 미셸 뷔토르Michel Butor, 훌리오 코르타자르Julio Cortázar등의 현대의 대 예술가, 철학자, 문인들에게 영감을 준 증거물들을 잔뜩 풀어놓고 있었다. 마르셀 뒤샹은 그를 일컬어 길을 가리킨 사람He who points way”(‘가르친이 아니다)이라고 했다 한다. 루셀의 아프리카 인상Impression d’Afrique(GF Flammarion, 2005)의 앞 부분에 소개문을 쓴 티펜느 사므와이요Tiphaine Samoyault는 레이몽 루셀이 거대한 창조 기계, 놀라운 타자기를 제공했다고 쓰고 있다.

내가 그를 이해하려고 여러 번 시도했으나 포기하고 말았던 씁쓸한 기억이 되살아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푸코가 그에 관한 장문의 모노그라피(레이몽 루셀, Gallimard, 1963)를 쓴 데에 홀려서 그의 책 전부를 주문해서 읽어보기를 여러 번 시도했었으나, 매번 중도에 책장을 덮고 말았었다. 그리고 까마득히 그를 잊고 있다가, ‘루셀에 관한 전시회를 처음 한다고 하는 이 낯선 마드리드에서 그를 다시 만나고 그에게 열광했던 사람이 푸코뿐만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되씹고 있는 것이다. 질투와 비탄에 젖어서.

그리곤 저 우울의 담즙은 맹렬한 호기심에 말라 타오르며 나를 부추기고 있었다. 어서 귀국해서 다시 도전해보자고. 저 루셀에게 홀린 자들이 무엇보다도 아프리카 인상을 거론하고 있으니, 당장 그 책부터 열어 젖히자고. 이 투지를 그러나 나의 일과는 어김없이 꺾어버리지 않겠는가?(2012.01.29.)

 

추기: 소피아 미술관에서의 마주침이 채근한 덕분으로, 귀국하자마자 책장에서 꺼낸 아프리카 인상, 역시 예상한 대로, 진도를 내지 못하고 있다. 다만, 책을 열자마자 마주친 소개문의 필자인 티펜 사므와이요가 내 제자인 주현진 박사의 프랑스 친구로 재작년 연세대학교 국제학술대회에 와서 발표하기로 약속되었으나 개인적인 사정으로 오지 못했던 그 사람이라는 걸 문득 깨달았다. 이 사람의 글이 매우 활기가 넘친다. 주박사가 참 좋은 친구를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