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울림의 글/시집 읽기 (26)
정명교(정과리)의 문신공방

최규승의 『속』(문학실험실, 2020.08)을 읽다 보면, 어렸을 때 말로, ‘난닝구’를 입고 바람부는 들판에 서 있는 사람이 떠오른다. 이 이미지는 김수영의 「풀」에서 동풍을 맞으며 발밑에서 풀의 운동을 느끼는 인물의 그것과는 정반대에 위치한다. 「풀」의 인물이 발목의 감각을 통해서 생의 원기를 주입받고 있는 데 비해, 내가 떠올리는 최규승의 인물은 바람을 맞고 다 헤어진 런닝셔츠를 통해 존재의 해체를 겪고 있는 중이다. 삶이란 끊임없이 존재가 허물어지는 과정이다. 요컨대 최규승의 시를 감싸고 있는 마음은 허무함이다. 그러나 또한 그 마음의 심지는 여전히 단단하게 살아 있어, 자신의 거죽이 무너지는 것을 슬퍼한다. 그것이 그로 하여금 끊임없이 저의 넋을 애도하게 한다. 그는 라마르틴느Lamartine처..

일간지의 서평란이 준 갑갑함(직전 글: 「일간지들의 서평란」, ‘사막의 글’)에서 해방되려고 이 책 저 책 시집들을 뒤지다 장현의 『22: Chae Mi Hee』(문학과지성사, 2020.06)을 발견하였다. 이 시들은 기본적으로 ‘일기’이며 왜 일기를 쓰는 지 시인은 명료하게 알고 있다. “선생님 제가 할 줄 아는 것과 하고 싶은 건 일기 쓰는 것밖에 없습니다.”(「Monday, July 1, 2019」) 라고 그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다음 시구는 그 이유의 핵심을 보여준다. 참지 못하고 그늘을 찢고 나온 학생들은. 별의 폭발음에도 호들갑 떨지 않으며 피로한 표정으로 휴대폰을 보며 걷습니다. 발을 절며 따라가는 신입생 그리고 학생들은 길로 들어갑니다. 학교 바깥으로 조금만 나가면 길에서 길로 길에서 오..

고광식의 『외계행성 사과밭』(파란, 2020.05)은 읽을만하다. 마치 우주를 날아다니는 잡석 더미들처럼 짧고 날카롭고 요란한 모습으로 떼를 이루며 달려드는 현대문화의 부박함과 폭력성을 ‘태양’과 ‘달’의 동시적 소멸로 파악하고 있는 시인의 감수성은 횡행하는 공격적 물체들에 스치며 부유하는 여린 사람의 마음의 결을 차분한 어조로 묘사하고 있다. 그 묘사의 자세는 기본적으로 자기연민적인데, 마음의 결을 촘촘히 짚어내는 언어의 느릿느릿한 성실함이 그런 자세가 감상으로 빠지는 걸 제어하고 있다. 이 언어적 성실함을 시적 인물의 행동으로 현상하면, ‘머뭇거림’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인물들은 끊임없이 머뭇거린다. 안쪽 치통을 붉은 눈으로 누르며 버찌술을 눈물 없이 삼켜 볼까 고민한다 죽은 사슴벌레의 축축함을 ..

옛날 시집들을 뒤적거리다가 김미지의 『문』(모아드림, 2004)을 읽고 깜짝 놀랐다. 상당히 좋은 시집이다. 게다가 책 말미에 붙은 해설, 「김미지의 시세계」(강경희)도 시 세계를 적절히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어떻게 거의 거론되지 않았고 이제는 아주 잊혀버린 상태가 되어 있는 건지 모르겠다. 시집 몇 군데의 쪽들에 스티커가 붙어 있고, 간단한 노트도 있는 것으로 보아, 내 딴으로는 썩 흥미롭게 읽은 듯한데, 그러나 나도 이 시집에 대해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았고, 그리고는 까마득히 잊어버린 채로 있었던 것이다(2004년이면 나의 정신적 고통이 극에 달한 시기로서 어떤 글도 쓰지 못하고 있던 형편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나의 공적 의무에 대한 변명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이제 다시 읽어 보니, ..

최근에 재기가 돋보이는 젊은 시인들의 시집이 주루룩 출간되었다. 나열하면 아래와 같다.(가나다순) 강혜빈, 『밤의 팔레트』, 문학과지성사, 2020.05 류진, 『앙앙앙앙』, 창비, 2020.04 박윤우, 『저 달, 발꿈치가 없다』, 시와 반시, 2020.05 이원하, 『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 문학동네, 2020.04 이 젊은 시인들의 공통된 특징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어조의 해방이다. 아주 오랫동안 한국시는 특정한 종결어미들에 고착되어 왔다. 일제강점기 때도 그러지 않았는데, 이상하게 1960년대 이후부터 ‘~다’의 객관적 묘사체가 압도적으로 지배하는 가운데 가끔 ‘~인가’, ‘~구나’ 류의 독백적 표현체가 저 묘사 안에 도사리고 있는 무거운 감정의 표면을 슬쩍 열어보이곤 했다. 19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