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명교(정과리)의 문신공방

고광식의 『외계행성 사과밭』 본문

울림의 글/시집 읽기

고광식의 『외계행성 사과밭』

비평쟁이 괴리 2020. 7. 15. 05:36

고광식의 외계행성 사과밭(파란, 2020.05)은 읽을만하다. 마치 우주를 날아다니는 잡석 더미들처럼 짧고 날카롭고 요란한 모습으로 떼를 이루며 달려드는 현대문화의 부박함과 폭력성을 태양의 동시적 소멸로 파악하고 있는 시인의 감수성은 횡행하는 공격적 물체들에 스치며 부유하는 여린 사람의 마음의 결을 차분한 어조로 묘사하고 있다. 그 묘사의 자세는 기본적으로 자기연민적인데, 마음의 결을 촘촘히 짚어내는 언어의 느릿느릿한 성실함이 그런 자세가 감상으로 빠지는 걸 제어하고 있다. 이 언어적 성실함을 시적 인물의 행동으로 현상하면, ‘머뭇거림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인물들은 끊임없이 머뭇거린다.

 

안쪽 치통을 붉은 눈으로 누르며

버찌술을 눈물 없이 삼켜 볼까 고민한다

죽은 사슴벌레의 축축함을 닦는다

두드리지 않은 글쇠가 오늘을 기록한다

사슴벌레 암놈을 노트북에서 발견한다

드러내다가 만 표정이 그리워져

며칠째 치통은 잊고 싶은 모퉁이에서 머뭇거린다 (사슴벌레 녘)

 

같은 시구는 전형적인 경우다. 이 머뭇거림들이 감정의 이른 배출을 억누르는 동안, 그냥 마음의 견딤만이 안쓰레 지속되고 있는 것만은 아니다. 낯설고도 그리운, 잊혀져 있었던 듯한 꿈의 형상들이 상처난 자리의 언저리에서 문득문득 피어나고, 새로운 언어, 새로운 공기를 퐁퐁퐁 잣는다. 이를테면 사슴벌레 녁같은 신조어를.

시쓰기의 차분함으로 견줄만한 선배 시인이 있다면 아마도 정재학일 것이다. 그런데 정재학이 그렇듯 이런 조근조근한 말차림은 시인이 현실의 문학 무대에서 돋보이는 걸 방해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와 공감할 독자들은 적게나마 꾸준히 있을 것이다. 있길 바란다. 순수한 의미에서의 마음의 단장(丹粧)이 행해지는 자리이고, 누구나 수시로 그걸 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건강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새 마음의 은근하지만 자발적인 움틈을 위해서.

 

'울림의 글 > 시집 읽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최규승의 『속』  (0) 2020.09.07
장현의 『22:Chae Mi Hee』  (0) 2020.07.25
김미지의 『문』  (0) 2020.05.31
2020년의 젊은 시인들  (0) 2020.05.31
새로운 시인 이지아의 『오트 쿠튀르』  (0) 2020.04.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