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울림의 글/시집 읽기 (26)
정명교(정과리)의 문신공방

※ 아래 글은 『포에트리 슬램』 제 8호 (2021.06)에 발표한 글이다. 잡지가 나온지 시간이 꽤 경과했다고 판단하여, 블로그에 싣는다. 1. 옛 시인들이 된 이들의 시집 옛 친구들로부터 두 권의 시집이 도착했다. 이윤학의 『나보다 더 오래 내게 다가온 사람』(간드레)과 주창윤의 『안드로메다로 가는 배민라이더』(한국문연)이다. 나는 이 시인들과 개인적인 친분은 없다. 주창윤 시인은 만난 적도 없다. 하지만 우리는 문학적 경험을 공유하고 있다. 저 혹독한 시 가뭄의 시대, 즉 1990년대의 시베리아를 우리는 시를 끌어안고 통과했다. 우리의 고투에도 불구하고 좋은 성과를 얻지는 못한 것 같다. 기나긴 20여 년의 적막 끝에 2010년대 후반부에서부터 시가 다시 되살아난 것은 분명했다. 그러나 그것은 90..

※ 아래 글은 지난 토요일(2021년 7월 3일) 경기도 안성의 '조병화 문학관'에서 '조병화 그의 시'라는 주제 하에 발표한 글이다. 오후 2시부터 전상국 선생이 스승과의 추억담을 말씀하셨고, 그 다음에 내가 발표하였다. 1. 양산과 여유 조병화 선생은 53권의 시집에 3327편의 시를 남겼다[1]. 이는 엄청난 숫자다. 평균하면, 59년(1947-2005) 사이에 매 해 56 편 이상의 시를 쓰셨다. 게다가 연배가 늘어날수록 시의 양이 많아졌다는 것도 흥미로운 특징이다. 『조병화 시 전집』 전 6권은 각각 13(전쟁기간 포함), 9, 8, 9, 7, 9년 주기로 나뉘었는데, 각 권에 수록된 시들은, 차례로 271, 496(370), 375(321), 630, 755(698), 742(599)편이다[2..

안태운의 『산책하는 사람에게』(문학과지성사, 2020.11)는 유년의 시선을 탁발하게 응용한 시집이다. 여기에서 유년이란 통상적으로 가정되는 천진난만, 즉 순수성을 내장한 존재로 이해되는 것과는 다른 방향에서 해석된다. 어린아이는 순수하다고 하기보다는 호기심이 많다고 말하는 게 정확하다. 어린아이는 처음 세상을 접하면서 그 모습에 신기해하고 무언가 알고 싶어하고 더 나아가 거기에 개입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어린아이는 세상을 이해하는 방법도 배우질 못했고 세상을 다루는 방법도 알지 못한다. 그런데도 어린아이는 낯선 대상을 만나면 다가가고 싶은 충동에 강렬히 이끌린다. 이런 상태의 유년은 행동성은 최소화된 반면 가능태는 최대화된 존재이다. 그때 아이의 충만한 가능성은 터지기 일보 직전, 즉 행동의 무한에 근..

강은교는 한국 시사상 가장 주술적인 시인이라고 할 것이다. 그의 시는 시종이 없는 무한의 노래로 들린다. 이 무한의 노래는 저녁에 시작되어 새벽까지 이어지고 이튿날 아침 햇살에 바톤을 넘기고는 다시 저녁에 시작되는 일을 되풀이하고 되풀이해서 오늘에서 고생대 사이의 무한 순환으로 나아간다. 저녁에 양파는 자라납니다 푸른 세포들이 그윽이 등불을 익히고 있습니다 여행에 둘러싸인 창틀들, 웅얼대는 벽들 어둠을 횡단하며 양파는 자라납니다 그리운 지층을 향하여 움칫움칫 사랑하는 고생대를 향하여 갈색 순모 외투를 흔듭니다 저녁에 양파는 자라납니다 움칫움칫 걸어나오는 싹 시들며 아이를 낳는 달빛 아래 그리운 사랑들 (「시든 양파를 위한 찬미가」, 『아직도 못 만져본 슬픔이 있다』, 창비, 2020.11 ) 하루의 순환..

이기성의 『동물의 자서전』(문학과지성사, 2020.09)은 사라진 세계를 슬퍼하는 시들도 채워져 있다. ‘사라진 세계’라고 한 것은, 화자가 사라졌다고 생각한 것이 ‘장소’ 혹은 공간이기 때문이다. 그 장소는 명백하게 있는데, 그러나 사라진 장소이다. 그런 장소의 형상성을 시인은 첫 시부터 눈 덮인 세상의 이미지로 드러내고 있다. 이게 뭘까. 입속에 수북한 눈송이. 하얀 눈 흩어진 벌판에 나는 갇히리. […] 너의 망각 속에서 나는 하얗게 얼어붙으리, 생각하면 이게 뭘까, 내 입 속에 수북한 눈송이. (「망각」) 이 시구에 의하면 사라진 세계는 나의 망각으로 인한 것인데, 그 망각의 결과 눈 송이가 “내 입 속에” 그득 쌓임으로써 ‘나’는 너를 노래할 수가 없다. 그 ‘노래할 수가 없다’라는 사정을 ‘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