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명교(정과리)의 문신공방

김미지의 『문』 본문

울림의 글/시집 읽기

김미지의 『문』

비평쟁이 괴리 2020. 5. 31. 09:55

옛날 시집들을 뒤적거리다가 김미지의 (모아드림, 2004)을 읽고 깜짝 놀랐다. 상당히 좋은 시집이다. 게다가 책 말미에 붙은 해설, 김미지의 시세계(강경희)도 시 세계를 적절히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어떻게 거의 거론되지 않았고 이제는 아주 잊혀버린 상태가 되어 있는 건지 모르겠다. 시집 몇 군데의 쪽들에 스티커가 붙어 있고, 간단한 노트도 있는 것으로 보아, 내 딴으로는 썩 흥미롭게 읽은 듯한데, 그러나 나도 이 시집에 대해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았고, 그리고는 까마득히 잊어버린 채로 있었던 것이다(2004년이면 나의 정신적 고통이 극에 달한 시기로서 어떤 글도 쓰지 못하고 있던 형편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나의 공적 의무에 대한 변명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이제 다시 읽어 보니, 이 시집은 오롯이 제 나름의 시적 가치를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사회적 상황에도 의미심장한 깨달음을 줄 수 있는 울림을 가지고 있다. 가령 첫 시, 4을 보자.

 

다시, 냄비 속에서 물이 끓는다

나는 긴 젓가락으로 휘저어 본다

매번 그렇지만 그 투명한 속을 알 수가 없으니

 

갑자기 냄비 속에서 길 하나가 솟구치며

라일락 흉내를 낸다, 보라색인가?

희미한 냄새가 나는 것도 같은데

다시, 냄비 속에서 길 하나가 솟구치며

날름 라일락 위에 앉는다, 까친가?

얼룩덜룩 꼭 흉터 자국 같은 게

 

성질 급한 길들이

죽은 듯한 길들이 죄다, 죄다……

萬物之生意最可觀

 

물이 증발해 버린 냄비 속에

투명한 현수막이 걸린다

 

제목의 ‘4은 물론 신생()에 대한 암시이며, 변혁(4.19)에 대한 암시이다. 시인의 속마음은 그에 대한 은근한 기대가 있다. 시의 화자는 그런 기대가 좀처럼 충족되지 않아서 마음에 조바심이 인다. 그러나 곧바로 그런 소망을 충족시켜주는 듯한 사건들이 일어난다. 시인-화자는 이게 그건가? 라고 묻는다. 긴가민가해서 마음이 더부룩해진다. 그러다가 다른 사건이 또 일어난다. 이번엔 진짜인가?

그렇다고 시인은 그것들을 저 관념 그대로 두지 않는다. ‘보라색’, ‘까치등의 개별성을 찾는다. 그러나 그것들이 결국은 성질 급한 길이 되어 죄다죽은 듯이 보이는 게 시인의 성질을 자극한다. 그렇게 성질 급해서 자멸하는 건 죄다” “죄야라고 외치고 싶어진다. 문득 옛 현자의 말씀이 떠오른다.

 

萬物之生意最可觀

 

정명도(程明道) 선생, 즉 내가 송대의 유학자라고 배운 정호(程顥)의 말이라고 주를 달아놓고 있다. 우리 말로 옮기면, “만물지생의최가관이다. 정확한 뜻을 알기 위해 문헌을 뒤졌더니, 정호의 책은 가지고 있질 않아서 주자가 근사록에서 인용한 걸 찾았다. 인용된 전 문장은 다음과 같다.

 

萬物之生意最可觀此元者善之長也斯所謂仁也.”〔『程氏遺書11_ 42

 

한문의 대가 이광호 선생이 풀이한 바에 의하면, 뜻은 다음과 같다.

 

만물을 생성시키는 의지는 가장 볼 만한 것이니이것이 선의 으뜸이 되는 원)이니이른바 인이다.” (이상, 주희·여조겸 편저, 엽채葉采집해, 근사록 집해 I, 이광호 옮김, 아카넷, 2004, 126)

 

만물지생의최가관만물을 생성시키는 의지에 대한 강력한 지지와 소망을 보내고 있는 어구이다. 그런데 내겐 이 시행이 그렇게도 들리고 동시에 “‘만물을 생성시키겠다고 성질내는 저 운동들이 참으로 가관(可觀)이구나라는 뜻으로도 읽힌다.

즉 이 시구는 진언이면서 동시에 반어이다. 진언으로 읽을 때 이 시는 시의 뜻을 한껏 위로 끌어올리면서 시에 흠흠한 품격을 부여하고 있다. 조금 과장해서 읽으면 승무를 보는 느낌을 가질 수도 있다. 조지훈 선생이 묘사한 그대로의 그 느낌을. 하지만 반어로 읽으면 이 시구는 오늘날 온갖 정치적 소란에 대한 예리한 비판이 된다. 그러면서 ‘4.19’가 가리키는 경지의 본뜻을 되새기게 한다.

시집, 』 은 이렇게 함초롬하면서 동시에 반성을 유도하는 시들로 풍성하다. 이 시인이 꾸준히 시를 쓰고 있는지 궁금해서, 마침 시집에 이메일이 있길래 서신을 띄웠다. 회신이 오긴 왔는데, 내용이 모호하다. 그래도 다행이다, 다행이다, 라는 말을 주억댄다.(2020.05.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