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울림의 글/시집 읽기 (26)
정명교(정과리)의 문신공방

이지아의 『오트 쿠튀르』(문학과지성사, 2020)는 놀라운 두께를 감추고 있는 시집이다. 그가 감추고 있는 것은 그의 과거이자 현재인 생인데, 그는 그것들을 즉각적인 은유로 감춘다. 즉각적이라는 것은 그의 은유가 통상적인 제유중복의 원리를 따르지 않고(휠라이트Wheelwright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곤 하는데, 은유의 두 가지 종류[치환은유 vs 병치은유]에 대한 구별은 쓸데 없는 것이다. 그 차이는 단지 유사성의 거리로 인한 착시일 뿐이다), 매 순간 매 장소의 근처에 놓이거나 혹은 심리적으로 그러한 환유적인 것의 기능변환을 통해서 한다는 것을 뜻하는데, 그래서 그의 시는 해독이 쉽지가 않다(해설을 쓴 조재룡은 날카롭게도 그걸 ‘트랜스로직’이라는 용어로 가리키고 있다.) 그런데 그러한 비유의 기..

우리는 독특하면서도 어딘가 날렵한 기운이 있는 걸 두고서 ‘유니크하다’라는 표현을 흔히 쓰곤 하는데, 함기석의 『디자인하우스 센텐스』(민음사, 2020)는 그런 수식에 썩 어울리는 시집이다. 그의 시들 주변에 일렁이는 기운은 매우 한가한 사색이다. 그는 책들과 주변과 풍경들과 상상들을 무심하게 오고 가면서 거기서 눈에 띄는 단어와 문장들을, 새가 모이를 줍듯, 콕콕 찝어서 글의 캔버스로 옮겨 놓고 있는 듯하다. 그리고 체로 알곡들을 거르듯 단어들을 간종그리고 이곳저곳에 배치하면서 그 효과를 본다. 놀라운 것은 그 결과이다. 그가 마침내 완성하는 글의 고치에서는 삶에 대한 유니크한 통찰들이 마치 껍질들이 잘게 부서지면서 벌들이 날아오르듯 대기로 퍼진다. 그리고 그 통찰들 자체라기보다, 그것들에 대한 감각적..
김순기Soun-Gui KIM의 글과 그림은 글-그림이면서 글/그림이다. 애초에 동양의 전통적인 서화(書畫)에서 출발한 듯이 보인다. 그러나 화가-시인은 서로를 거울처럼 비추고 있는 글과 그림을 분리시켜서 유사성을 이타성으로 이동시킨다. 그 이동은 유사성 내부에 이타성을 발생시키는 것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유사성의 세계를 통째로 이타성의 세계로 바꾸는 것이기도 하다. 이 점에서 그의 글-/그림은 옛것의 이국취향을 이용하여 새로움을 현시하는 작업과도 다르며, 푸코가 마그리트와 워홀 등에서 찾아낸 유사(類似)의 상사(相似)로의 전환과도 다르다. 푸코가 해석한 마그리트가 근대 예술의 이데올로기로서의 재현의 해체와 반복 유희를 통한 새로움의 발생을 특징으로 갖는다면, 김순기의 서화는 재현 내부에서 재현되지 않은 것..
오은의 새 시집, 『유에서 유』(문학과지성사, 2016)는 그가 말장난에 천재적인 재능을 가졌다는 걸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그의 손은 말의 분수이고 거기서 뿜어져 나오는 물은 형형색색일 뿐 아니라 춤까지 춘다. 그런 버라이어티 쇼를 보면서 나는 오은이 입이 간지러워 미칠 지경인 줄로 알았다. 그러나 차츰 그의 입은 시방 침이 바짝 말라 있다고 짐작하게 되었다. 입이 간지러운 사람은 언어의 풍요를 갈망하지만, 입이 마른 사람은 정말 하고 싶은 이야기를 못해서 입의 수액을 계속 소모시키고 있다. 그것은 시인이 오늘의 상황은 언어의 과잉으로 인하여 진실의 드러냄으로서의 언어의 기능이 망실된 지경에 이르렀다고 판단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의 수다는 이 과잉된 언어를 눙치고 비틀고 찌르고 깨물고 늘리고 ..
의무로 주어진 글쓰기가 하기 싫어 공연히 시집들을 뒤적거린다. 이곳의 헌책 좌판에서 산 에드몽 자베스Edmond Jabès의 『엘리야Elya』를 조금씩 읽는다. 읽다가 다음 구절에 머물러 이 말의 천재적인 곡예사가 보여주는 휘황한 순간에 한참 사로잡힌다. 원죄는 기억의 죄이다. 우리는 결코 시간의 끝에 가 닿지 못할 것이다. Le péché initial est péché de mémoire. Nous n’irons jamais au bout du temps. ‘le péché initial’은 ‘원죄’에 대한 일반적인 프랑스어 표현인 ‘le péché original’의 의도적인 변형으로 보인다. 아마도 논란을 피하고 싶다는 심리도 끼어들었을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 후자의 형용사가 확정적인 데 비해 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