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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한 글쓰기의 양상과 의미 - 강정아의 『책방, 나라 사랑』 본문

울림의 글/소설읽기

투명한 글쓰기의 양상과 의미 - 강정아의 『책방, 나라 사랑』

비평쟁이 괴리 2024. 9. 26. 08:52

※ 아래 글은 '동인문학상' 제 55회 아홉번째 독회에 대한 결과로서의 독회평이다. 조선일보 홈페이지에서도 읽을 수 있다. 신문사의 양해를 얻어 블로그에 올린다.

강정아의 『책방, 나라 사랑』(강, 2024.07)에서 가장 눈에 띄는 특성은 문체의 투명성이다. 가령 이런 대목을 보자.

언니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언니는 그 대학에서 제일 예쁘고 인기 있는 여학생이었다. 만나는 모든 남자들이 언니를 보기만 하면 반했다. (p.31)

이 짧은 두 문장은 문장과 의미가 그대로 일치한다. 어떤 암시도, 숨은 의미도, 내포도, 비유도 없다. 다른 작가의 작품과 비교해 보자.

아이는 소녀와 함께 있으면서 그 맑은 눈과 건강한 볼과 머리카락 향기에 온전히 홀린 마음으로 그네를 바라보기만 하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소녀 편에서는 차차 말없이 자기를 쳐다보기만 하는 아이에게 마음 한구석으로 어떤 부족감을 느끼는 듯했다. (황순원, 「별」)

이 작품의 아이도 소녀를 ‘바라본다.’ 이 바라봄의 의미를 독자는 상당량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작가는 그 의미를 감추어두고 있다. 아이가 보는 소녀는 무엇이 궁금할까? 또한 독자는? 그건 아이의 시선에서 아이의 ‘소망’을 짐작할 수 있으나, 그 소망의 실행에 대해서는 알지 못해서 궁금증을 자아낸다는 것을 가리킨다. 아이의 눈길은 현재에 계류되어 있으며, 미래를 갈망한다. 반면 강정아 소설의 앞 대목에선 모든 게 드러나 있다. 감정도, 행동도, 사건도.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또 다음 대목들과도 비교해보자.

 (1) 잘 차려입고 짙은 향수를 뿌린 늘씬하고 아름다운 남녀들과 눈이 마주칠 때마다 나는 미인을 바라볼 때의 남자들처럼 동공이 스르르 풀리는 것을 느낀다.(조경란, 『혀』)

(2) 어디선가 이상한 소리가 들려 고개를 돌려봤더니 민이가 숨을 참으며 웃고 있었다. 그애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어깨를 내리면서 더 큰 소리로 웃었다. (정한아, 『달의 바다』)

(1)에서는 실행(봄 직후의 반응)이 제시되어 있다. 그러나 그 실행의 의미는 분명하지 않다. 혹은 아주 무기력하다. 어떤 경우든 이 행동에는 주체의 능동성이 결여되어 있다. 게다가 이 실행을 추동한 생각 자체가 일반성으로 위장되어 있다. 이 묘사는 무의식 속의 어떤 다른 욕망에 대한 암시로 읽어야 한다.
(2)의 ‘민’의 웃음은 눈이 마주친 데 대한 즉각적인 반응이다. 그러나 이 반응은 속마음을 은폐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다. 
이상의 예와 달리, 강정아 소설의 묘사는 곧바로 실제를 지시한다. 언어와 사태 사이에는 어떤 간극도 없다. 가끔 간극이 벌어지긴 하지만, 곧바로 메꿔진다. 심지어 간극에 대한 불안이 자주 노출된다. 

그해 늦봄의 어느 날 수돗가에서 언니는 멋진 남자 선배에 대해 이야기했다. 가끔씩 언니는 내가 한 번도 본적 없는 그 남자가 더할 수 없이 멋진 사람이라는 데 동의해주기를 간절히 바라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 내가 공감하지 못하자 언니는 더 열성적으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멋진 그 남자에 대해 묘사하고 또 설명했다. 목소리가 좋고 연설을 잘한다는 것은 그렇다 쳐도 실없는 농담을 잘하고, 나무를 잘 타고, 시골에서 나고 자랐다는 점이 어떻게 그 많은 외모의 결점들을 커버할 수 있는지 이해할수 없었다. (pp..39~40)

이런 글쓰기 앞에서, 사르트르의 유명한 언명. “산문의 언어는 기호이고 시의 언어는 사물이다”라는 주장이 떠오르는 건 자연스런 일이다. 사르트르는 산문의 기호성을 ‘언어는 철저한 도구’라는 뜻으로 사용하였다.

산문이 어떤 기도를 위한 탁월한 도구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라면. 말을 초월적인 입장에서 관조(觀照)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시인의 경우뿐이라면. 우리는 산문가에 대해서 우선 다음과 같이 물을 권리가 있는 것이다. “당신은 무슨 목적으로 글을 쓰는가? 당신은 어떤 기도로 나선 것인가? 그리고 그 기도는 어떤 이유에서 글쓰기라는 수단을 필요로 하는 것인가?” 한데. 이 기도는 어떠한 경우라도 순수한 관조를 목적으로 삼을 수는 없다. 왜냐하면 직관(直觀)은 침묵이며 언어의 목적은 전달에 있기 때문이다. (『문학이란 무엇인가』, 정명환 역)

사르트르의 이런 입장을 간명하게 요약하는 명제가 있다. 그것은 “말한다는 것은 행동한다는 것이다.”이며, 그에 대한 비유로서의 “말이란 탄약을 장전한 권총이다. 말을 한다는 것은 권총을 쏘는 것이다.”이다.
사르트르의 이런 주장에 대해 이미 수많은 논란이 있어 왔다. 오늘의 목표는 이 논란안으로 다시 한 번 들어가는 게 아니다. 지금 주목할 것은, 이런 방식의 글쓰기가 21세기 들어 급증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젊은 세대의 자연발생적 작품 만들기가 증가하는 가운데 나타나는 병발적 현상이다. 그런데 이런 글쓰기의 상당수는 사태에 대한 즉각적인 신체적 반응들이다. 글은 표현 충동이 집중적으로 몰려든 길일 뿐이고, 그 길의 필연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어느날 이 길의 필연성에 대한 자각이 발생할 때, 저 신체적 글쓰기는 근본적인 특이점을 맞이할 것이고, 그때 신체적 반응은 완전히 다른 언어 궤도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아쉽게도 아직까지는 그런 ‘진화’를 찾아보기가 어렵다.
반면 강정아 소설의 글쓰기는 사태와 언어의 간극이 없다는 점에서는 똑같지만, 신체적 반응이 아니다. 이는 세상에 대해 이미 내린 명확한 판단의 적용이다. 즉 이 글쓰기는 의미의 단일성을 기반으로 존재하며, 그 불변하는 의미를 폭우 후의 강물처럼 흘려 보내는 과정이 소설의 전개에 해당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