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명교(정과리)의 문신공방
자기애의 진화사를 톺는다 -김기태의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 본문

※ 아래 글은 '동인문학상' 제 55회 일곱 번째 독회에 대한 결과로서의 독회평이다. 조선일보 홈페이지에서도 읽을 수 있다. 신문사의 양해를 얻어 블로그에 올린다.
한국소설이 개인들의 사생활을 소비해온 지 꽤 시간이 흘렀다. 이러한 소설적 경향의 득세가 소설에만 국한된 건 아니다. 이는 세계적인 문화 추세의 한 단면을 반영할 뿐이다. 그것은 모든 것을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생각하는 개인주의의 첨예화로서 ‘자기애’의 보편적 확산 현상을 가리킨다. 오늘날 대중 스타들은 자기애를 공공연하게 표방하고 그것을 하나의 사상으로까지 끌어올리는 데서 팬들의 공감을 블루베리를 따 담듯 수확하고 있다.
‘방탄소년단’이 유엔 연설(2017)에서 “진정한 사랑은 나 자신을 사랑하는 것에서 시작한다”고 발언하고 미국의 팝스타 마일리 사이러스Miley Cyrus가 “나는 너보다 더 잘 나를 사랑할 수 있어 / 나는 나 혼자 나를 위해 꽃을 살 수 있어”(「플라우어스」, 2023)라고 외친 것은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경향이 요 근래에 폭발한 특별한 21세기적 현상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개인이 중심이 되는 사고는 정보화 사회의 대두와 거의 평행적으로 개시되었다는 게 필자의 판단이다. 이미 1980년대에 휘트니 휴스턴은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사랑The Greatest Love of World」(1986)에서 “나는 오래 전에 어느 누구의 그늘 속에서도 걷지 않겠다고 결심했어 / […] / 나는 가장 위대한 사랑은 내 안에 있다는 걸 알았어 / 너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게 가장 위대한 사랑이야”라고 노래했었다. (이 노래의 원곡이 처음 발표된 건 1977년인데, 미국의 소울 차트와 R&B차트에서 랭킹에 들었으나, 1986년 휘트니 휴스톤의 노래는, “1986년초 미국, 호주, 캐나다 및 미국의 R&B 차트에서 정상을 차지했다”고 한다. - Wikipedia 참조. 따라서 이 노래의 정서적 반향은 1980년대 중반에 와서 폭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대중음악의 차원에서 보자면, 바브라 스트라이샌드가 “하나된 사랑은 둘이 함께 만든다는 걸/ 나는 너와 함께 찾았어”(「에버그린」, 1976, 이 노래는 ‘빌보드 핫 100 차트’에서 3주간, ‘이지리스닝 차트’에서 6주간 정상을 차지했었다. - Wikipedia)라고 노래했을 때의 정서로부터 근본적인 전회가 불과 10년 사이에 일어난 것이다. 휘트니 휴스턴이 꼭 이런 노래만을 부른 것은 아니지만, 넓은 시야에서 보면, ‘비틀스’가 “왜 나의 기타는 점잖게만 우나”(1968)라고 탄식하거나, 그 멤버였던 존 레논이 「이매진」(1976)에서 “천국이란 없다고 상상해 봐 / […] / 모든 사람이 모든 세상을 나누는 것을 상상해 봐”라고 호소했던 20세기 중반기 ‘로큰롤 세대’ 혹은 ‘반전세대’의 ‘함께 하는 문화’로부터 ‘나만의 문화’로의 전환이 이즈음에 싹이 돋아났던 것으로 짐작된다. 이 1980년대는 미국에서는 퍼스널컴퓨터의 제 1단계 혁명이 일어나던 때였다. 그리고 그로부터 10년 후 한국에서도 어린이 인권에 대한 요구가, 문화산업의 영역 확장 사업과 맞물리며, 천둥을 치게 되는데, 오늘날 4,50대를 이루는 이 세대가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국민교육헌장」, 1968)를 외우며 자란 전 세대와 결정적인 빗금을 그으며 새로운 사회적 세력으로 자라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그 시절은 한국에도 16비트 퍼스널컴퓨터가 세운상가를 중심으로 양산되기 시작하였고, 처음으로 어린이의 능력이 어른의 능력을 앞지르는 분야가 있다는 걸 알려준 때였다.(그 이전에 ‘큰 이야기’로부터 ‘작은 이야기’로의 전환을 요구했던 준비기가 있었다는 것도 유념해야 할 것이다. 그러니까 순수 개인의 출현과 개인중심의 사유는 1990년 전후에서 피어나기 시작했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 앞의 진술에서 ‘결정적인’이라는 말은 기미가 사실로 정착되었다는 것을 가리킨다.)
혹시 오해가 있을까 봐 덧붙이지만, 이 문화적 전회 자체는 가치평가 대상이 아니다. 앞의 진술을 꼼꼼히 읽은 분들을 금세 알겠지만, 이는 불가피한 변화이다. 그리고 모든 시대와 그 시대의 중심 세대는 저마다 고유한 가능성과 한계를 가진다. 때문에 각 시대의 탄생과 전개에서 나타난 현상들을 ‘전수조사’하는 것도 꼭 필요한 일이고, 시대들 사이의 맥락을 추적하고 상호참조하는 것도 필수적인 일이다.
여하튼 지금의 시점에서 돌이켜 보면, 자기애를 테마로 하는 긴 진화의 역사가 펼쳐져 왔음을 확인할 수 있다. 우발적이거나 단편적이거나 특이한 현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제는 그 과정과 결과를 함께 들여다보아야 할 때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이 이제는 묵을대로 묵은 ‘새 패러다임’ 자체를 신주단지 모시듯 보듬고 사는 것보다는 훨씬 생산적이다.
김기태의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문학동네, 2024.05)은 바로 이 진화의 후과를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무엇보다도 이 젊은 작가의 문장이 아주 밀도가 높다는 점을 평가해야 하리라. 그것이 짧은 단편 둘레에 역사를 감을 수 있는 힘으로 작용하였다. 즉 하나하나의 문장들이 되풀이를 가능한 한 줄이고 이야기의 여백 너머로 펼쳐지는 작품 밖의 상황을 은밀히 암시함으로써 적은 어휘들 주변으로 삶의 전체적 상황이 요동치는 광경을 느낄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다. 이는 자코메티가 한 인물의 조각을 통해서 세계 전체를 그리려고 했던 것과 비슷한 기도를 품는다(물론 모든 작품이 다 성공했다고 말한다면 작가의 오만을 방치하는 꼴이 되리라.)
필자는 모든 소재를 우겨넣는 오늘날 한국 소설들의 풍조(영화 「국제시장」을 상기해 보라)에 대해서 비판적으로 언급한 적이 수차례 있는데, 작품 바깥으로 세계의 상황이 방사되면서 작품의 내부 사건들과 서로 반향하는 것과 어울리지도 않는 소재들을 억지로 덧붙이는 것은 아주 다른 것이다.
가령, 외국인 이주 노동자의 아들과 고아나 다름없이 자란 소녀의 밋밋한 연애관계를 다룬 작품,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에서 『오징어 게임』의 성공담과 우크라이나 전쟁은 왜 나오는가? 별 볼 일 없는 두 인물의 일상을 장악하고 있는 것이 ‘자기 지키기’에 대한 강박행동이라면, 저 “수백억을 두고 목숨을 건 게임을 한다는 줄거리의 한국 드라마”가 상기된 것은 바로 자기애의 극단적 양상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그리고 우크라이나 전쟁과 대통령 선거는 문제의 드라마의 세계적(그렇다기보다는 실은 ‘제국에서의’라고 해야겠지만) 요란법석에 환유적으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환유적 연결은 작품 제목을 통해서 이 소설의 실질적 주제임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두 인물의 국제적 관계와 오늘날 국제적으로 벌어지는 소동 사이에 벌어져 있는 ‘위상’의 엄청난 격차가 주제라는 것이다.
실로 소설가 김기태는 자기애의 진화사의 도정에서 확산된 엄청나게 다양한 양상들을 촘촘하게 모집해 기초 질료들로 밑바탕에 깔면서 그 중 거의 무작위로 선별된 특정 인물들과 세계 일반, 혹은 인물들 사이의 어긋남, 다시 말해 ‘자기애’라는 동일한 감정핵으로부터 출발했으나 그 실제적인 현상태는 너무나 큰 차이를 벌리고 있어서, 그 뿌리가 같다는 것을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그런 양상들을 작품의 표면에 부각시킨다. 그리하여 인물들의 성공과 실패, 선전되는 것과 실제로 얻는 것, 외양과 이면, 마음과 행동, 지구촌과 민족국가, 서울과 시골, 더 나아가 자기애의 강화와 포기, 그리고 여전히 깃발처럼 날리는 자기애에 대한 다혈증적 이념-집념과 그것의 ‘자발적 시계태엽오렌지’식의 전환(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동명의 영화에서 나타난 양상이 ‘회유적[음모적]’이라면)등... 모든 면들 사이의 대비를 부조하면서, 그것들의 근본원인이었던 정서 쪽으로 독서의 눈길을 돌렸다가 사건으로 되돌아오도록 하기를 되풀이하는 와중에 독자로 하여금, 그 차이와 동일성에 대한 의혹과 성찰의 늪지대를 시종 종종거리게 한다.
이와 같은 작업을 통해 20세기 후반기부터 오늘날까지 세계의 가장 보편화된 정서에 대한 본격적인 해부가 작가의 무의식적 기도로서 진행된 게 이 작품집이라 할 수 있으니, 그런 탐사가 결국 독자에게 촉발했을 깨달음의 정도는 작가의 공력과 독자의 노력이 얼마만큼 교섭하며, 어느 수준에서 화응하느냐에 달려 있을 것이다.
작가의 편에서 보자면, 그의 시도를 드러내는 역선은 끊임없이 이어지는 욕망과 실제의 공방, 즉 욕망의 연쇄에서의 환유적 연결이라 할 수 있으니, 그가 얼마나 그 연결을 정직하고 정확하게 이었는가가 문학적 성취 여부를 판별케 할 것이다.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은 한 세미나에서 ‘환유’를 ‘리얼리즘’의 동의어로 사용하면서, 이렇게 풀이한 바가 있다. “소설은 현실에 대한 감각적 질료들을 무더기로 사용하는데, 그것들은 그 자체로는 어떤 것도 말하려 하지 않고, 어떤 가치도 갖지 않는다. 그런데 그것들이 자신들 너머의 어떤 의미의 선율을 떨며 연주하게 할 때, 소설이 있는 것이다. 그렇게 『전쟁과 평화』의 초입에서 어깨를 드러낸 숙녀들의 테마는 무언가 다른 것을 부각시키는 데 봉사한다. 위대한 소설가들의 위대함의 정도는 그들이 우리에게 보여주려고 집중하는 모든 것들이 상징적으로도 아니고, 우의적으로도 아니라, 서로 거리를 두고 반향하면서 무언가를 조형하는 정도라 할 것이다. 그것은 영화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어떤 영화가 좋다면, 그것은 환유적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주체의 도착perversion du sujet이 기능하는 바 역시 환유적이다.”(「도라와 젊은 동성애 여성」『세미나 제 4권』, Seuil, 1994, p.145; 마지막 문장은 이 글에서는 불필요하지만, 관심있는 사람들을 위해 부기한다.)
지나친 동일시라고 할 수 있겠으나, 예술에서의 리얼리즘이란 현실의 반영이 아니라, 성찰을 지속하는 힘이며, 그 힘의 유지를 통해서 현실의 밑바탕에 놓인 의미를 발굴하거나 혹은 현실을 넘어설 무언가를 창출하고자 하는 노력이라는 뜻으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만큼 선이 길쭉이 놓여 있으니, 그 노력이 쉽지는 않을 것이다. 오랜만에 보는 유망(有望이 流亡으로 빠지지 않기를 부디 빌거니와)한 젊은 작가를 기대하는 마음에 주름이 많이 접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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