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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명교(정과리)의 문신공방
※ 이 글은 계간, 『문화와 나』(삼성문화재단) 2020년 가을/겨울 호에 「감염병의 인류학」이라는 제목으로 발표되었던 것이다. 잡지가 간행된 지 시간이 꽤 흘렀다고 판단되어, 블로그에 싣는다. 1. 미래가 없는 인내 옥스퍼드 출판사의 ‘짧은 소개’ 총서에 포함되어 있는 『팬데믹Pandemics – 매우 짧은 소개』는 ‘감염병’에 대한 기술을 이렇게 시작하고 있다. 감염병은 통상 특정한 시기에 예기치 않게 일어나 광범위하게 퍼진 질병 사고를 말한다[i]. 그러니까 감염병은 ‘사고’다. ‘사고’의 성격은 ‘예측할 수 없었다’는 데에 초점이 놓인다. 미리 대비할 수 없고, 원인을 모르니 실상을 파악하는 데에 시간이 걸리고, 대강의 윤곽을 그려보기도 전에 지나가 버린다. 지구상의 생명이 사고를 견딜 수 있는 ..
‘진실’이라는 단어를 처처에 박아 놓은 어떤 책을 읽다가 “김수영은 혁명은 안 되고 당만 바꿨다고 개탄했”다는 구절을 읽고 기가 막혔다. 김수영은 “방만 바꾸어 버렸다”고 말했지, ‘당’을 바꾸었다고 하지 않았다. 왜 이런 오류가 일어났는가? 기억의 착오일 수도 있겠으나, 김수영의 시를 실제 읽지 않아서 벌어진 일이라면, 다시 한번 한국 지식인들의 얄팍함을 ‘개탄’하게 할만한 일이다(김수영을 읽은 사람이라면 그가 그런 말을 하리라는 걸 상상할 수 있겠는가?). 아주 오래전 일이지만 이런 일도 있었다. 어느 고위 관료가 은퇴를 하면서 TV에서 지나온 시절에 대해 인터뷰를 했다. 그 안에 ‘내 인생의 화두’라는 항목이 있었다. 고위 관료가 빈 칸에 ‘윤동주’를 적고는 윤동주의 시 한편을 들었다. TV 화면에..
옛 친구 강남옥 시인이 ‘카카오톡’으로 연락을 했다. 미국에서 살고 있다고 한다. 2 주 전 일이다. 마지막으로 본 건 40년 전이었던가? 그리고 오늘 그이의 새 시집, 『그냥 가라 했다』(산지니, 2020.11)를 받았다. 시집을 읽으면서 이국에서 모국어로 시를 쓰는 마음을 짠하게 느낀다. 이 땅에 사는 시인들이 자신이 한글로 시를 쓰고 있는 중이라는 걸 특별히 의식하던 시절은 한참 지났다(아마 김수영 세대가 마지막일 것이다.) 요컨대 오늘날의 한국 시인들에게 한국어 글자는 생존의 바로미터가 아니다. 그들이 그 언어를 특별히 생각하는 것은 생존 쪽이 아니라 생산 쪽이다. 즉 한글은 풍요한 상상세계를 이룩하는 데 쓰일 알곡들이다. 반면 외국 거주의 시인에게 모국어는 오늘의 모습을 근원에 연결해주는 절대적..
고(故) 신동준이 역주(譯註)해서 펴낸 『순자론』(학오재, 2009)을 읽다가 오늘의 한국 정치 현실을 풍자해서 유명해진 어떤 글의 생각과 맞물리는 게 많아, 이게 불변하는 세상의 풍경이려니 하는 생각에 마음이 허탈해진다. 한 대목을 인용한다. 난세의 징후는 이와 같다. 사람들이 옷은 조(組: 문양이 있는 넓은 띠로 사치를 의미)하고, 그 용모는 모두 부인을 모방하고[1], 그 풍속은 음란하고, 그 심지는 이익만을 추구하고, 그 행동은 열악하고, 그 성악(聲樂: 음악의 곡조)은 험악하고, 그 문장(文章)은 특채(慝采: 내용이 간특하고 辭藻가 화려함)하고, 그 양생(養生: 생활)은 무도(無度: 절도가 없음)하고, 그 송사(送死)는 척묵(瘠墨: 簡薄, ‘墨’은 묵자를 상징)하고, 예의를 천시하며 용력(勇力)..
내 모든 사무를 관리하는 Microsoft Access에 기능 추가가 필요해서 그 일에 끙끙대느라고 한달 여를 다 보냈다. 이번에 새로 배우게 된 것은 폴더와 파일 문제를 처리하는 File System Object와 Function의 리턴 값을 할당하는 여러가지 방법이다. 데이터베이스에 갇혀 사는 사람은 고문서(archives)에 묻혀 사는 사람과 마찬가지로 자료에 몰두하는 바람에 세상살이며 주변의 일에 거의 마음을 쓰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 보니 자신이 탐구하는 자료가 어떻게 유통될 수 있는지에 대한 궁리는 싹트기가 힘들다. 어떻게 하면 자료들에 접근할 수 있을까가 독점적인 관심사가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파일 입출력 같은 건 나중에 여유가 있을 때 할 일로 미뤄두기 십상이다. 아니 좀 더 정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