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사막의 글 (40)
정명교(정과리)의 문신공방
“혁명은 재방영되지 않을 거야. 형제들. 혁명은 라이브일 거야.” 소울 뮤지시언, 질 스콧-헤론Gil Scott-Heron이 그의 노래 「혁명은 TV로 방송되지 않을 것이다」(1970)에서 한 말이라고 『르 몽드』의 장 비른바움Jean Birnbaum이 전하고 있다. 대통령을 도망가게 한 ‘우크라이나 혁명’의 경과를 TV가 ‘생생하게’(?) 전달하고 있는 이 순간에도 가수의 말은 조금도 무색해지는 데가 없을 것이다. 우리는 TV를 통해 혁명의 풍경을, 기껏해야, 몇 개의 장면들을 ‘보고’ 있을 뿐, 혁명‘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혁명은 오직 세상의 개벽과 나의 거듭 남의 완벽한 맞물림 속에서만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는 이 고유한 의미에서의 혁명이란 오늘날 오로지 ‘장기생성’적인 양태로밖..
황지우의 『나는 너다』 복간본에 대한 해설을 쓰느라 두 달을 다 써버렸다. 고생한 보람은 있었다. 나는 그가 1980년대 말에 무슨 고민에 사로잡혀 있었는지를 찾아낼 수 있었고, 그 고민이 그가 당연히 맞닥뜨려야 할 정당한 고민이라는 걸 알았다. 그러나 그와 고민을 공유한 사람이 당시에 극히 희귀했었다는 건 80년대의 한계를 그대로 지시한다. 나는 1988년의 「민중문학론의 인식구조」에서 그와 동일한 화두를 띄웠으나 그 이후 정반대의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여하튼 황지우의 시에 대한 얘기는 해설에서 지겨울 정도로 썼으니 그걸로 그치련다. 그 해설을 쓰면서 나를 내내 사로잡았던 다른 생각은 우리 세대가 김현 선생의 영향을 얼마나 깊이 받았는가, 하는 것이었다. 기성 문화물의 해체·재구성으로 이루어진 황지..
고종석씨가 인터넷에 내 오역을 지적하는 발언을 올린 걸 읽었다. 놀라서 살펴 보니 변명의 여지가 없는 완벽한 잘못이다. 위고Hugo의 시, 「잠든 보아즈」중의 “haineuse”(증오에 차 있다)를 “가증스럽다”라고 옮긴 것이다. 1999년에 『한국기호학회』지 제 5집에 발표했고 2005년 『문학이라는 것의 욕망』이라는 평론집에 수록했던 글, 「정신분석에서의 은유와 환유」에서이다. 책에 실을 때 아무런 검토도 하지 않았다는 것은 게으름이라는 잘못이 하나 더 보태졌다는 것을 가리킨다. 왜 이런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한 것일까? 무엇보다도 앞만 보고 달리는데 급급하여 되돌아볼 시간을 충분히 갖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 인생이 늘 그랬다. 그러니 내가 알지 못한 채로 저지른 실수가 얼마나 많을 것인가? 10여 년..
“마약의 소비는 의미 결여를 소비하는 것이다.” 우연히 틀은 TV에 노사회학자 알렝 투렌느(Alain Touraine)가 나와서 한 말이다. France 2의 금요일 문화 프로그램 「오늘 저녁 아니면 못 봐요) Ce soir (ou Jamais)」에서이다. 이렇게 간결하게 핵심을 짚기도 흔치 않을 것이다. 그가 덧붙여야 할 말이 있다면, 의미 결여가 소비되는 까닭은 의미결여가 의미로서 소비되기 때문이라는 점이리라. 그러지 않으면 그게 ‘사용’되고 ‘소비’될 일이 없을 것이니까. 거기에 생각이 미치면 의미결여를 의미로서 소비하는 게 마약만은 아니라는 데에 눈뜨게 된다. 그 노인장이 그 말 앞에 “우리는 오늘 의미를 주는 것에 대해서 절대적으로 무관심하고 절대적으로 침묵하고 있다”라고 힘주어 말하고 있듯이,..
“김일성일가체제가 핵무기를 보유함으로써 결정적으로 외부의 압력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게 되었다 하더라도, 북한 주민의 지지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은 여전히 변함이 없다. 그런데 몇 개의 상품과 몇 종류의 DVD가 이 무지의 갑주를 깨뜨려버릴 수도 있다.” 북한전문가인 안드레이 란코프Andreï̈ Lankov가 한 말이라고 『누벨 옵세르바퇴르』10월 3일자(2552호)가 전하고 있다. 최근의 북한을 취재한 기사, 「세상에서 가장 닫혀 있는 나라로의 여행」의 후반부에 지하유통망을 통해서 한국의 드라마가 북한에 퍼져나가고 있는 현상을 소개하면서 결론삼아 인용한 것이다. 그 앞에 옮겨진 재일교포 기자가 했다는 말은 다음과 같다: “이 통속극들이 북한 사람 모두를 열광시키면서 북한은 지금 남쪽 문화에 젖어들고 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