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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명교(정과리)의 문신공방
아래 글은 2015년 11월 25일 김옥길 기념강좌에서 르 클레지오J.-L.G Le Clézio 선생이 발표한 글이다. 선생의 양해를 얻어 이 블로그에 올린다. 제 개인사로 시작하는 것을 양해해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세계를 떠돌다 프랑스 남부 니스에 정착한 모리셔스 섬 이민자의 후손으로 태어났습니다. 제 아버지와 어머니 집안은 모리스계입니다. 하지만 제 선조 중 한 분이 1793년 프랑스 대혁명 ‘공포 정치(민중사에서 이 단어가 쓰인 게 이 때가 처음이었습니다)’ 때, 프랑스에 만연해 있던 내전과 기아를 피해 환영의 땅을 찾아 인도양의 이 작은 섬으로 이주했습니다. 길고 험난한 여행 끝에 —인도로 떠났던 그의 형제 중 한 명은 배가 난파돼 사망했습니다.—, 이 선조는 그가 프랑스에서 가져올 수 있었던 소..
이사한 후 책 정리를 하던 중, 이탈로 칼비노의 『왜 고전을 읽는가』(이소연 역, 민음사, 2008)가 눈에 띄길래 반가운 마음에 다시 읽어보다가 문득 「스탕달과 먼지구름으로서의 지식」에 롤랑 바르트의 마지막 에세이가 거론된 걸 확인하였다. 이 에세이는 내가 『1980년대의 북극꽃들아, 뿔고둥을 불어라』의 서문에서 한 구절을 인용한 바로 그 글이었는데, 놀랍게도 제목이 달랐다. 부랴부랴 원문을 찾아봤더니, 내가 틀렸다. 원 제목은 「“우리는 우리가 사랑하는 것에 대해 말하는 데 항상 실패하기 마련이다 On échoue toujours à parler de ce qu’on aime」(Tel Quel, No 85, Automne 1980)인데, 나는 내 책의 서문에서 한 대목을 제사로 쓰고는 각주에 「자기가..
A: 로빈 윌리엄스가 죽었대. B: 자살인가 봐. A: 어릴 적에 방이 40개도 넘는 넓은 저택에서 거의 혼자 지냈다고 해. B: 불쌍한 사람이었군. A: 그래도 살았는데, 예순이 넘어 목숨을 끊을 생각을 왜 했을까? B: 서양 사람들은 많이 그러데. 삶에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면, 자살을 하더라구. 우리는 도저히 살 수가 없어서 자살하고. A: 그게 무슨 차이야? B: 우리에게 자살은 생존의 문제이고, 서양 사람들에게는 의미의 문제라는 거겠지. 그래서 한국에서는 지식인들의 자살이 거의 없어. 서양에선 지식인들의 사건인 경우가 많은 데 비해. A: 그렇구나. 그건 한국에서 사는 것과 배운 것의 괴리가 얼마나 심한가를 보여주는 방증이기도 하겠다. B: 차라리 단절이라고 해야 할 지도 몰라.
세월호 참사로 한국의 미디어에 접속하는 게 끔찍하다. 혹시나 싶어 들어갔다가는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아 바로 나오고 만다. 우리가 한국인으로 살아 온 역사의 가장 날카로운 모서리가 여기에 깎여 접근하는 모든 것을 찢고 할퀴고 쑤시는 흉기로 튀어나와 있다. 우리 모두가 책임져야 할 문제다. 그런데도 최고 상층부에 있는 사람으로부터 저변에 있는 사람들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고발만 하고 있다. 사람도 사람이지만 이 광증을 온갖 종류의 미디어가 부추기고 있다는 것이야말로 참혹한 저주이다. 이 집단적 증상과 이 조직적 조작 역시 한국인의 현대사의 결과적 현상이다. 이 글 역시 저 고발에 포함되는 게 아닌가? 유일한 차이는 저 고발이 세월호의 책임자들을 무차별적으로 지목하는 데 비해, 이 글은 고발하는 자들을 가리키고..
요 며칠 간 프랑스 대도시들에 공해 경보가 계속 울리고 있다. 그러더니 오늘 티브이에서는 그르노블, 렝스, 깡 등 몇몇 대도시들이 자동차 운행을 줄이기 위해 메트로와 트람을 비롯해 대중교통을 주말에 무료로 운행하기로 했고, 파리 등은 자전거를 무료로 대여하기로 했다는 뉴스를 보낸다. 이런 소식들 때문에 나는 프랑스라는 나라가 지겨워지다가도 다시 좋아할 수밖에 없게 된다. 현실과 이상 사이의 타협점을 가장 합리적인 수준에서 찾아내는 일을 이 나라보다 더 잘하는 데는 없는 것 같다. 공해 얘기가 나왔으니 생각난 건데, 나는 한 달 전쯤에 『르 몽드』 「사설」에서 디젤이 공해의 가장 못된 주범 중의 하나라는 글을 읽고 충격을 받았었다. 8년 전에 파리에 체류할 때 디젤이 연비도 줄이고 공해 물질 배출 문제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