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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한국인은 인용을 서툴게 하는가? 혹은 ‘진실의 빈곤’에 대한 우울한 사색 본문

사막의 글

왜 한국인은 인용을 서툴게 하는가? 혹은 ‘진실의 빈곤’에 대한 우울한 사색

비평쟁이 괴리 2020. 12. 10. 19:31

진실이라는 단어를 처처에 박아 놓은 어떤 책을 읽다가 김수영은 혁명은 안 되고 당만 바꿨다고 개탄했다는 구절을 읽고 기가 막혔다. 김수영은 방만 바꾸어 버렸다고 말했지, ‘을 바꾸었다고 하지 않았다. 왜 이런 오류가 일어났는가? 기억의 착오일 수도 있겠으나, 김수영의 시를 실제 읽지 않아서 벌어진 일이라면, 다시 한번 한국 지식인들의 얄팍함을 개탄하게 할만한 일이다(김수영을 읽은 사람이라면 그가 그런 말을 하리라는 걸 상상할 수 있겠는가?).

아주 오래전 일이지만 이런 일도 있었다. 어느 고위 관료가 은퇴를 하면서 TV에서 지나온 시절에 대해 인터뷰를 했다. 그 안에 내 인생의 화두라는 항목이 있었다. 고위 관료가 빈 칸에 윤동주를 적고는 윤동주의 시 한편을 들었다. TV 화면에서 그 시가 올라가는 걸 보고 당혹했고, 곧이어 경악을 했다. 내가 읽어 본 적이 없는 그 시는 윤동주의 시가 아니라 윤동주의 시라고 인터넷에서 떠돌고 있던 시였다. 또 이런 일도 있었다. 어느 책을 읽다가 “‘모든 근대 문화는 식민지 문화라는 자크 데리다의 명제처럼이라는 구절을 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해서 데리다의 책들을 뒤졌더니 원문은 이랬다.

모든 문화는 본래 식민적이다 Toute culture est originairement coloniale.[1]

이 진술은 상식적인 얘기를 정치적으로 재해석한 것이다. 문화는 물처럼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는 넓게 퍼져 있는 이야기에, “때문에 문화는 타자에게 일방적으로 적용되려는 성격에 의해 추동된다는 정치적 의미를 부여한 것이다. 여하튼 이 문화의 특성은 보편적인 것이지 근대 문화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그런데 왜 그것에 한정사를 입혔을까? 아마도 인용한 사람이 프랑스어로 읽었을 것 같지는 않고, 일본어나 한국어 번역본으로 읽었거나 아니면 누군가에게 들었거나 했을 것 같은데, 어느 지점에서 오류가 일어났든, 일종의 심리적 강박이 초래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어찌 됐든 가장 배려해서 생각한다 하더라도, 공적인 발표의 시점에서 최종적인 확인을 하지 않았다는 얘기가 된다. 그것은 늘 진실의 기치를 치켜 들고 발표되는 한국 지식인들의 발언들이 심각한 빈곤 상태에 놓여 있음을 가리킨다. 이 엉성하고 허약한 담론들을 두고 진실의 빈곤이라고밖에는 달리 말할 게 없다.

푸르동Prouhdon빈곤의 철학 Système des contradictions économiques ou Philosophie de la misère(1846)에 대한 마르크스의 비판서, 철학의 빈곤 Misère de la philosophie(1847)을 번역한 역자들이 「역자 서문(1988)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는 것은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끔 한다.

현재 우리의 변혁운동은 ‘철학의 빈곤’으로 고통받고 있다. 변혁운동을 인도하는 과학의 철학적 기초가 확고히 정립되지 않는 한, 변혁운동은 사이비 과학에 의해 인도되고, 이는 변혁운동을 방해하는 결과까지도 초래하게 될 것이다. 현실적으로 우리는 이러한 상황을 목도하고 있다. 그러한 사이비 과학 중에서 실천적으로 가장 커다란 장애요소로 되고 있는 것은 ‘경험론’ 또는 ‘실증주의’에 근거한 사이비 과학이라 할 것이다. [...] 이러한 과학은 ‘단순한’ 경험 내지 행동(계획적인 물질적 활동, 즉 실천이 아니다!)을 일반화시킨 것일 따름인데, 이는 불가피하게 ‘공상’으로 된다.[2]

위 글에서 “‘경험론또는 실증주의’”편견과 풍문으로 바꾸면 오늘날 한국의 지식 사회를 아프게 짚게 될 것이다. ‘경험론, 실증주의라도 절실한 시절인 것이다. 물론 거기에만 의존하는 것도 사실은 편견과 풍문을 뒤에 깔고서 안주하는 함정에 빠질 수 있다는 것도 우리는 또한 보고 있다. 그럼에도 그거라도 있어야 최소한 쟁론이 가능하지 않은가? 저마다의 편견을 진실로 호도하는 상황에서는 생각의 바퀴는 진흙땅에 빠져 나아가질 못한다. 그 편견이 때때로 과학으로 착시되는 경우는 더욱 더 그렇다.

처음엔 너무 웃겨서코미디로 시작했는데, 쓰다 보니, 우을증 환자의 일기 같은 것이 되었다. 에잌

코미디를 돌이키고 싶어서, 김수영 시의 첫 연을 소개한다.

 

혁명은 안 되고 나는 방만 바꾸어 버렸다

그 방의 벽에는 싸우라 싸우라 싸우라는 말이

헛소리처럼 아직도 어둠을 지키고 있을 것이다 (「그 방을 생각하며」)

 

헛소리는 흰소리가 되어부렀다. 어둠을 지키기는커녕 어둠에 천연색 스프레이들을 뿌려대고 있다. 코미디가 즐거움을 주기는커녕 콩 메르디에 Con merdier로 돌변해 버렸다. 제기랄!

 

 

[1] Jacques Derrida, Le monolinguisme de l'autre, Paris: Galilée, 1996, p.68

[2] 칼 마르크스, 철학의 빈곤 - M. 푸르동의 빈곤의 철학에 대한 응답, 강민철·김진영 옮김, 서울: 아침, 1988, p.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