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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라우마를 양식화하는 문학의 출현 - 성혜령의 『버섯 농장』 본문

울림의 글/소설읽기

트라우마를 양식화하는 문학의 출현 - 성혜령의 『버섯 농장』

비평쟁이 괴리 2024. 6. 27. 09:48

※ 아래 글은 '동인문학상' 제 55회 여섯 번째 독회에 대한 결과로서의 독회평이다. 조선일보 홈페이지에서도 읽을 수 있다. 신문사의 양해를 얻어 블로그에 올린다.

성혜령의 『버섯 농장』(창비, 2024.04)은 종래의 소설적 문법을 완전히 무시하고 있다. 두드러지는 건 인물들의 집요한 의식 혹은 몸의 성향이다. 그들 앞으로 사건들이 툭 튀어나와 나무토막들처럼 굴러 다닌다. 
이 사건들은 원인이 희박하고 맥락도 거의 없다. 최초의 원인은 있으나 전개는 납득이 가지 않는다. 그럼에도 갑자기 발발한 것들이 사라지질 않는다. 사건들에 긴박한 논리적 연결이 있을 때에는 인물들이 그 사건 둘레에서 겉돌기 일쑤이다. 그들은 사건에 참여하지 못한다. 
인물들은 그런 사건들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고 집요하게 매달리거나, 거꾸로 끊임없이 무시하려고 하지만 그것들이 인물들을 끈덕지게 괴롭힌다. 그리곤 어떤 이해나 의미부여가 안되는 데도, 인물들의 삶에 영향을 미친다. 대부분 이 사건들은 보이스피싱 등 사기 사건들같이 인물들에게 치명상을 입힌다. 
겉으로 봐선 자질구레하지만 당사자에게는 절박한 사태들을 해결할 방책은 없다. 범행에 연루된 사람도 의도적으로 그걸 계획하거나 거기에 가담한 것이 아니라 우연히 얽혀든 존재들이어서 변명은 가득하지만 해결책은 없다. 가만히 보면 그 사람들 하나하나는 선량한 시민들이다. 요컨대 별 볼 일 없는 존재들이다.
굉장히 많은 사건들이 터졌지만 아무 것도 변한 것은 없다. 다만 삶은 하염없이 어떤 파국으로 흘러들어가는 것 같다. 대부분의 작품들에서 죽음이 등장한다. 그렇다고 해서 세상은 망하나? 그것도 아니다. 예전에 백가흠은 첫 소설집의 모든 작품에서 하나 이상의 인물을 시체로 만들었다. 거기에는 서사적 인과관계가 있었다. 그런데 성혜령 작품의 죽음은 우연하고 낯설고 그냥 거기에 발생한 채로 있다. 서사 내부의 한 고리가 아니라 이야기의 동체에 와서 툭 부딪치는 돌덩이 같다.
그렇다면 이런 소설이 왜 필요한가? 고전적인 의미에서 소설이 ‘발단-전개-위기-클라이맥스-대단원’으로 전개된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 소설들에는 이런 문법이 부재한다. 있다면 오로지 ‘위기’들만이 계속되는데, 이 위기들에는 당연히 충만해야 할 것 같은 에너지가 제로이다. 아드레날린이 왜 분비되지 않나? 마치 여기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은 그냥 시커멓게 변해버린 암덩이들 같다. 
독자는 다시 묻는다. 이 소설은 왜 존재하는가? 왜 이렇게 쓰는가? 이런 회의적인 질문에 대답이 하나 올라온다. 그런데 거기에서 벌어지는 거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늘상 벌어지는 일 아니야? 생각해보니 그렇다. 그러나 소설이 현실을 나열하는 건 아니잖아.  사건은 움직여야 돼. 그래서 인물이 됐든 독자가 됐든 이 문제들을 해결하고자 하는 의지를 발동하게끔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즉시 누군가 대꾸한다. 그런데 거기엔 분명 글쓴이의 의도가 작용하고 있어. 잘 읽어 봐. 휴대전화가 울리는데, 안 받잖아. 실은 안 받는 게 아니라 인물의 강박증을 묘사하는데 시간을 다 써버려서 인물이 휴대전화를 받는 다음 행동이 나오기 전에 작품이 끝나버리고 만 거야. 화자가 인물에게 정신이 팔린 거라고. 작가가 일부러 그랬다고 봐야 하지 않나?
그렇군.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 ‘방기’의 형태로 사건들을 내버려두는 건 소설 윤리에 어긋나는 것 아닌가? 다시 대답이 들려온다. 방기라고 할 수 없네. 첫 작품을 다시 봐. 피해자 일행이 찾아간 범죄자의 아버지는 초점 화자가 화장실에 다녀왔더니 죽어 있었어. 그 아버지의 머리를 피해자가 골프채로 툭툭 건드리지. 그걸 사이코패스의 위악적 행동이라고 봐서는 안 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상황에 대한 일종의 상징적 기습이라고 봐야지. 좀 놀래 봐! 일어나 봐! 하면서 힘을 주는 것이란 말일세. 그런 거였군. 하지만 이런 상징적 처리가 세상을 바꾸지는 못하네. 다시 대답. 그래. 세상은 요지부동이지.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상징적 행위들이 독자에게 전하는 게 있다네. 절대로 잊지 못하게끔 하는 것. 이 말없는 끔찍한 사건들을 영원한 악몽으로 느끼게 하는 것.
『버섯 농장』은 독자의 머릿 속에 끊임없이 의혹들을 주입한다. 그것들은 독자의 강박관념이 된다. 소설 속 인물들의 강박증이 독자에게 전이되는 것 같다. 그렇게 해서 삶의 사건들이 항구적으로 못박힌 트라우마가 된다. 왜 그렇게 하나? 오늘날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게끔 하기 위해서다, 라고 밖에는 달리 해석할 길이 없다. 그렇다. 끊임없이 끔찍한 사건들이 벌어지지만 사람들은 거기에 적당한 의미를 부여하면서 지나간 사건으로 만든다. 그리고 잊는다. 그런데 유사한 사건들은 여전히 일어난다. 
일본의 영화 감독 기타노 타케시는 폭력이 난무할 뿐만 아니라, 그것들을 폭죽처럼 터뜨리고는 신나게 춤을 춰대는 가학적인 영상들을 만들었다. 영화학자 숀 레드몬드는 이런 영화 미학을 두고, “폭력을 이미지 속에 트라우마처럼 심고, 불규칙적으로 일어나는 기억들을 통해 폭력의 사건들을 관객의 눈동자 속에 집어 넣은 후 나사를 죄어 잠금”으로써, “폭력을 항상적 형식으로서, 모든 것들 속에 있는 ‘그것’으로서, 피가 낭자한 아수라장이 없어도, 폭력을 음울한 현존 혹은 현재로서 굳어버리게 한다”라고 풀이한 적이 있다.( Sean Redmond, 『기타노 타케시의 영화: 꽃처럼 피어나는 피 The Cinema of Takeshi Kitano: Flowering Blood』,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2013, p.37.).
양태는 다르지만 『버섯농장』이 트라우마를 상징화하고 고착시킨다는 점에서 기능은 같다. 이는 트라우마를 극복, 혹은 그로부터의 해방이라는 고전적인 문학적 기능을 거꾸로 거스르는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는 이유가 있어 보인다. 우리는 너무 쉽게 해결책을 찾고 잊어버리고 있는 건 아닌가? 좀 더 근본적인 해결책을 모색해야 하는 건 아닌가? 그러니 이 소설이 독자를 더욱 꼼짝달싹하게 만든다 할지라도, 그 정지의 순간 괴로운 사색을 할 수밖에 없는 건 독자의 위생에 필요한 일이기도 할 것이다. 이런 생각을 타고 한 시구가 머리 속에 떠오른다. 기 드보르Guy Debord가 프랑스어로 번역했던 15세기 스페인 시인의 그 시구가:

잊지 말게, 잠자는 영혼이여,
너의 마비상태에서 빠져나와,
똑바로 보게,
삶이 어떻게 돼 가는지,
죽음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경악하시게.
기쁨이 어떻게 달아나는지.
그 다음에, 그에 대한 추억은
어떻게 우리를 괴롭히는지.
그리고 그런데도 우리는 왜 믿고는 하는지.
무엇이든 지나가고 나면, 더 좋아질 거라고. 
- 호르헤 만리케  Jorge Manrique , 『그의 아버지의 죽음에 관한 절, Stances sur la mort de son père 』 , traduit par Debord, Guy, Paris: Le temps qu'il fait, 1980[1480], p.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