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2024/08 (10)
정명교(정과리)의 문신공방
※ 아래 글은 '동인문학상' 제 55회 여덟 번째 독회에 대한 결과로서의 독회평이다. 조선일보 홈페이지에서도 읽을 수 있다. 신문사의 양해를 얻어 블로그에 올린다.로뎅의 「생각하는 사람le penseur」을 로봇에게서 만나는 건 곤혹스런 느낌을 준다. 잘 알다시피 저 유명한 조각가의 ‘생각인’은 ‘지옥의 문’(단테) 앞에서 고뇌에 빠져 있다. 임수현의 『퇴역로봇』(문학수첩, 2024.06)이 전해주는 우리의 ‘생각봇’, ‘제로원’은 DMZ 안에 버려진 채 끊임없이 생각의 더듬이를 옮기는 일에 빠져 있다. 그는 본래 전투용으로 개발되었으나 전쟁이 기획상품이 되어버린 시대에 할 일을 잃고, 탐사로봇으로 살다가 마침내 퇴역당하고 만다. 우선 이 로봇이 가상적으로 AI의 미래를 그린다는 점을 가외로 짚고 넘어가..
※ 아래 글은 '동인문학상' 제 55회 여덟 번째 독회에 대한 결과로서의 독회평이다. 조선일보 홈페이지에서도 읽을 수 있다. 신문사의 양해를 얻어 블로그에 올린다. 듀나의 짧은 단편들이 주는 매력은 미니멀한 사건이 윙크하듯이 띄우는 미묘한 암시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 암시들은 정말 미묘(微妙)한데, 그것은 독자를 거듭해서 해석의 두 갈래 길 앞에 놓기 때문이다. 가령 이번 소설집, 『찢어진 종이조각의 신』(단비, 2024.06)의 첫 작품, 「가거라, 작은 책이여」는 유명한 문학작품들에 대한 독서경험을 제공하는 ‘책읽어주는 아무개’류의 ‘사이파이Syfy’ 버전을 대상으로 하고 있는 소설로서, 정작 문제가 되는 것은 정보취득으로 전락한 독서(경험)가 아니라, 그것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과 그 가족들의 자..
1980년에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폴란드 시인 체스와프 미워시(Czesław Miłosz)는 「다윈 부인 Mrs. Darwin[1]」이라는 짧은 우화에서 인간을 동물의 수준으로 격하시켰다고 남편을 비난하는 다윈 부인에 맞서 “만물에게 공통된 이치”를 밝혀낸 다윈의 공적을 기린다. 다윈을 통해서 자연과 인간과 생명과 우주에 차별 없이 적용되는 변화의 원리가 처음으로 이해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만물에게 공통된 이치는 만물 사이의 끝없는 변화이다. 산다는 것의 핵심에 ‘변화’를 심어 놓음으로써 다윈의 진화론은 모든 불완전한 존재들의 삶에 영원히 고갈되지 않는 정신의 기름을 주유(注油)하게 되었다. 변화가 진리라면 존재의 불완전성은 불행이라기보다 차라리 상승을 꿈꾸는 자가 가진 특권이 된다. 완전한 존재는 더 ..
프랑스는 통상 매해 9월에 소설들을 쏟아낸다. 그래서 이를 두고 ‘문학의 계절이 돌아오다 La rentrée littéraire’라고 부른다. 프랑스의 주간지, 『누벨 옵세르바퇴르Le Nouvel Observateur』의 소식지(2024.08.23.)에 의하면 올해 9월의 소설출간작은 459종이리고 한다. 작년의 466종에 비해 7종이 줄었고, 기록을 경신했던 2010년의 701종에 비하면 형편없이 “쪼그라들었다resserrée”는 탄식이 사방에서 들린다고 한다. 하지만 ‘소식지’의 필자, 엘리자베트 필리프Elisabeth Philippe의 관심은 다른 데에 있다. 459종도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니라는 것! 이중에서 어떤 작품을 고를 것인가? 작가의 명망을 보고 사면 틀림없이 “완벽히 실망”하리라고 주..
▶ 아래 글은 '작가' 지의 평론 등단작에 대한 심사평이다. 조성면씨는 등단 이후, 한국의 장르 문학에 대해 깊은 이해를 가진 전문가가 되었다. 그가 여전히 무명의 상태로 머물러 있다는 건 안타까운 일이다.조성면의 「환멸의 시학, 환상의 정치학」은 판타지 소설에 대한 문학사회학적 분석을 시도한 글이다. 판타지 소설은 90년대 이후 통신망의 자유 기고가들에 의해 급성장하여 10-20대 독서층의 지지를 업고 재래의 독서 공간까지도 광범위하게 잠식해 들어왔다. 그 질적 수준이 어떠하든 이 압도적 현상 자체가 비평가들로부터 외면당해 왔다는 것은 애석한 일이다. 그것은 문학이 살아내야 할 환경 중의 하나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왜 판타지 소설인가? 왜 한국에서는 하필이면 판타지인가? S/F나 추리소설은 왜 안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