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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에게 미국은 무엇인가? - 문지혁의 『고잉 홈』 본문

울림의 글/소설읽기

한국인에게 미국은 무엇인가? - 문지혁의 『고잉 홈』

비평쟁이 괴리 2024. 4. 25. 18:51

※ 아래 글은 '동인문학상' 제 55회 네 번째 독회에 대한 결과로서의 독회평이다. 조선일보 홈페이지에서도 읽을 수 있다. 신문사의 양해를 얻어 블로그에 올린다.

문지혁의 『고잉 홈』(문학과지성사, 2024.03)은 두 가지 특징이 가장 먼저 눈에 띈다. 하나는 대부분의 인물들이 미국 이민자, 혹은 미국 여행객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주인물들은 정착한 이주민이 아니라, 이런 저런 이유로 이동 중인 상태에 있기 일쑤이다. 그래서 그들은 캐리어를 끌고 있고, 버스 매표소 혹은 공항 근처에서 서성인다.
또 하나의 특징은 서술이 아주 매끄럽다는 것이다. 서술의 중심을 차지하는 인물의 심리는 풍경과 인상 사이의 날렵한 대응관계의 연속으로 이루어져 있다. 즉 여기에는 집요한 추구나 복잡한 사색은 없다. 대신 세상이 눈 앞에 낯선 풍경처럼 펼쳐지고 그에 대한 주인물(화자)의 때마다의 느낌이 토로되며 지나간다. 
주인물의 물리적 위치는 바깥에서 이동하는 중에 있으나, 그의 마음은 실내에서 유리창 바깥의 스쳐 지나가는 물상들을 지켜보고 있는 형국이다. 왜 이런 야릇한 어긋남이? 이는 여행 소설인가? 이민자 소설인가? 마치 문명판 ‘디아스포라’의 양 축을 동시에 겹쳐 놓은 듯한 이런 모양은 무슨 의미를 품고 있는가?
사실 이런 엽기적인 배치에는 한국인의 미국 이민사에 대한 작가의 날카로운 통찰이 숨어 있다. 전쟁 이후 한국인의 삶에서 미국만큼 강력한 영향을 미친 나라는 없을 것이다. 기회가 주어지면 이민을 가고 유학을 갔으며 어떻게든 미국에 정착하려고 애를 썼다. 강대국의 위력에 환멸을 느껴 비판적인 의견을 가진 사람들도 미국에 근거지를 확보하고 자식을 미국 시민으로 만드는 일에 주저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고향에 돌아오려고 애썼다. 첫 번째 작품, 「에어 메이드 바이오그래피」의 ‘미스터 호철 리’처럼. 성공한 사람일수록 고향에 돌아와 말년을 보내고 싶다는 갈망에 집착했다. 그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능력을 한국에 돌아와 발휘하고 싶어한다. 그건 시방 현재 진행중이다. 그러면서도 무슨 보증서처럼 미국과의 연을 놓치려 하지 않는다. 소설집 제목이 가리키듯이 그들은 끊임없이 ‘고잉 홈’하고 있다.
작가는 이런 상황이 아주 긴 역사를 가지고 있고, 한없이 되풀이 되어 왔다고 관찰한다. 그런 관찰이 낳은 깨달음이 있다. 한국인은 미국에 살러 가지 않았다는 것이다. 살러 간 게 아니라, 무언가를 획득하러 갔다는 것이다. 자격증을 따고 박사 학위를 따고 돈을 벌러 갔다는 것이다. 공부를 해도 학문에 매진한 게 아니라 거기서 ‘증’을 따기 위해 공부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 인물은 ‘대학원’ 다닌 경험을 두고 무심코 “학원 다닐 때”(p.99)라고 회상한다.
그러니까 한국인은 미국에 이주한 후에도 여전히 한국인이었다는 것이다. 기어코 집에서 한국음식을 해먹듯이. 그러니 그들이 거주하는 미국은 여전히 낯선 타자인 것이고, 무언가를 빼내어야 할 자원이기만 하다. 
이것은 좋은 것인가? 나쁜 것인가? 좀 더 정확하게 말해, 이런 이주민들의 태도는 고향 사랑인가? 아니면 자기에 대한 집념인가? 전자라면 그 고향은 무엇이고, 후자라면 그 자기는 무엇인가? 더 나아가 결코 스스로 자신의 본질이라고 간주하는 자신의 정체성을 버리지 않는 이런 태도의 집단적 움직임은 인류의 공진화에 도움이 되는 것인가? 아닌가? 거기까지 탐구하지 않지만 독자에게 그런 물음을 떠올리도록 끊임없이 유도한다. 
어떤 사람은 이런 삶에 아주 익숙해진다. 타성화된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이런 태도 자체가 불가사의다. 그래서 이 집단주의에 어쩔 수 없이 얽혀드는 순간, 그에게 닥치는 것은 공포의 광경들이다. 두 유형의 대비를 통해 작가가 노리는 게 독자의 궁금증이다. 
남는 문제가 있다. 이런 태도가 이민자 2세에게는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가? 그들은 이주민으로서가 아니라 정착민으로서 살게 된다. 그들은 부모 세대와 같은 ‘한국적 자아’에 대한 집착을 가질 수 있을까? 요즘 미국 문화의 일각에서 도드라졌듯이 그 2세가 한국적인 것을 그려서 주목을 받는다면, 그들에게 한국적인 것은 무엇인가? 이 역시 인류의 공진화에 여하히 작용을 할 것인가? 작가는 이런 문제를 탐구하는 데 충분한 경험을 쌓은 듯하다. 더 밀고나가길 바란다.
또 하나의 문제. 한국/미국을 둘러싼 이 기묘한 길항은 한국의 ‘서울/지방’이라는 구도에도 어김없이 적용되고 있다는 짐작이다. 1960년대 이래 한국의 작가들은 서울/시골의 변증법에 끊임없이 청진기를 들이대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럴듯한 진단이 내려진 적은 없었던 듯하다. 『고잉 홈』은 이 문제에 대해서도 중요한 시사를 줄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