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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리소설이 불가능한 세상의 비극을 관통해 나가기 - 최제훈의 『블러디메리가 없는 세상』 본문

울림의 글/소설읽기

추리소설이 불가능한 세상의 비극을 관통해 나가기 - 최제훈의 『블러디메리가 없는 세상』

비평쟁이 괴리 2024. 5. 29. 21:39

※ 아래 글은 '동인문학상' 제 55회 다섯 번째 독회에 대한 결과로서의 독회평이다. 조선일보 홈페이지에서도 읽을 수 있다. 신문사의 양해를 얻어 블로그에 올린다.

최제훈의 소설에 익숙한 독자에게는 『블러디메리가 없는 세상』(문학과지성사, 2024.03)에서 거의 최제훈스럽지 않은 밋밋함을 보고 놀랄만하다. “이 사람이 나이를 먹었나?” 본래 매우 자극적인 말의 향신료를 듬뿍 칠한 추리적 재능이 번득였던 작가는 소재를 ‘사이파이’ 쪽으로 옮겨 가고 있는데, 그렇다고 전개되는 서사는 미래에 대한 씩씩한 도전도, 아니면 디스토피아적 세계에서 벌어지는 끔찍한 재앙적 사건들도 아니다.
한 가지 공통된 특징이 있다면 모든 것이 이미 결정되어 버렸다는 느낌 혹은 판단으로부터 비롯되는 무기력의 미립자들이 작품들의 바탕에 “뿌옇고 축축한 안개”(p.213)처럼 깔려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점에 주목하면 이 작가가 창조한 작중 인물들이 대체로 세상에 대해 미리 ‘감을 잡는’ 습관에 아주 익숙하다는 점을 떠올리게 된다. 요컨대 그의 인물들이 어떤 사실이나 사태 앞에서 ‘간을 보는’ 버릇이 농후한 존재들이었으며, 이는 이번 소설집에서도 여전히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이 소설은 그의 장기인 ‘추리 소설’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지, 그로부터의 단절이 아니다. 다만 달라진 게 있을 뿐이다. 실로 소설집의 제목은 그런 우리의 추론을 뒷받침한다. “블러디메리가 없는 세상”이라는 것이다. 이 정의는 특정 작품의 제목이 아니다. 작품 「토피아」의 한 절 ‘제 14일’에 나오는 사소한 한 대목이다. 화자는 ‘토마토’를 중심에 놓고, 그걸 비롯해, “케첩과 카프레제와 블러디메리가 없는 세상”(p.169)을 상상한다. 이어지는 대목은 ‘토마토’에 대한 자신의 호오에 관한 잡념이다. ‘블러디메리’는 우연한 잡티처럼 끼어들어 있는데, 실은 제목으로 쓰여, 이 작품집 전체의 주제를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블러디메리가 없”다는 건 무슨 뜻인가? 추리 소설이 불가능한 세상이라는 것으로 읽을 수밖에 없다. 그러니 추리적 인간들은 여전히 이 안에 살아 있는데, 그들이 추리를 할 세상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길재 시조의 유명한 구절 “산천은 의구한데 / 인걸은 간 데 없네”를 뒤집어서 “사람은 여전한데 / 세상이 변했구나”라고 말하는 품이다. 
추리소설이 불가능한 세상이란 무엇인가? 추리소설은 흔히 ‘범죄의 시학 Poetics of Crime’ 혹은 ‘살인의 시학Poetics of Murder’을 구현한다고 거론된다. 추리 소설은 범죄 소설이기도 하며, 소설은 범행을 시학으로 만든다는 것이다. 범죄에 시학에 있다니? 범죄 예찬인가? 
문헌을 뒤져 보면, 범죄소설의 사회적 기능에 대해 대체로 세 가지 의견이 있다 . [1]
. 하나는 자본주의의 무능력을 폭로한다는 주장. 왜냐하면 범죄를 해결하는 건 경찰이 아니라 사립탐정들이니까. 그 둘은 현실에서 소외된 개인의 낭만적 보상의 표현이라는 주장. 왜냐하면 무고한 자가 범인으로 의심받고 사건을 해결하는 건 아웃사이더니까. 그 셋은 범죄가 지역 공동체와 가족의 사안이던 황금기에 대한 향수의 표현이라는 주장. 그 시대에 범죄자는 공동체 사람들의 합심을 통해 법정으로 끌려간다. 이 주장은 셜록 홈즈의 추리는 왓슨을 통해서 독자에게 중개되다는 점을 날카롭게 짚어낸다. 
구 공산권의 학자로부터 제기된 첫 번째 주장은 ‘자본주의’를 ‘거대 현실’로 대체하고, ‘무능력의 폭로’를 ‘조작을 통한 저항’으로 바꾸면 두 번째 주장에 가까워진다. 그러나 두 주장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추리소설의 사회적 기능에 대한 이런 견해들은 범죄 발생의 불가피성을 전제로 한다. 범죄는 욕망이 질서의 울타리를 넘을 때 발생한다. 그런데 욕망은 인류의 생존과 진화를 위해 필수불가결한 정신적 요소이다. 
하지만 첫 번째 주장은 범죄 발생의 장소를 ‘자본주의 사회’로 한정한다. ‘자본/노동’의 계급 분리가 타파되고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실현된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범죄가 발생할 리가 없고 따라서 추리소설은 불요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실제 사회주의 국가에서 범죄는 발생하지 않았나? 80년을 못 채운 현실 사회주의의 붕괴 자체가 지도 집단인 당의 ‘총체적 부정’에 기인한 것이었다. 그런 주장은 사실상 생명의 본성을 착각한 무지에 다름아니다. 그런 류의 주장이, 특히 지식인들 사회에서,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는 건, 실로 불가사의한 일일 것 같지만, 실은 일종의 권력 투쟁과 헤게모니의 사안으로 해석하면,  그 스스로도 모르는(혹은 ‘자발적 무지’를 통해 은폐된) 음흉한 저의가 드러난다.
‘범죄의 시학’은 범죄의 불가피성에서 비롯된다. 범죄의 불가피성을 인정한다면 범죄에 대한 상상, 추적, 해결을 위한 궁리 등 모든 범죄에 관한 모든 사색이 지적 생명의 정신 훈련의 항목 속에 포함된다. 게다가 위에서 언급한 세 가지 주장에 모두 보통 사람들의 참여가 들어 있다는 건, 이 정신 훈련의 민주성을 넌지시 가리킨다. 때문에 여기에 삶의 즐거움이 없을 수 없다. 프랑스의 뛰어난 인류학자이자 철학자였던 로제 카이유와Roger Caillois와는 범죄의 상상과 범죄자에 대한 처단 모두에 ‘놀이’하는 쾌락이 들어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펀치[영국의 익살스러운 인형극, 『펀치와 주디』의 주인공〕는 자기 아내와 자식을 죽이고 거지에게 동냥을 주지 않으면서 그를 심하게 때리며 갖가지 종류의 죄를 저지르고 사신(死神)과 악마를 죽인다. 그리고 마침내는, 자기에게 벌주러 온 사형집행인을 자신의 교수대에 매단다. 영국의 관객이 그토록 많은 끔찍한 짓에 박수를 보낸다고 해서, 그 고의적인 풍자 속에서 그들의 이상상(理想像)을 찾는 것은 확실히 잘못일 것이다. 관객이 그 끔찍한 짓들을 칭찬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요란스럽고 악의없는 즐거움이 그들의 마음을 풀어준다 : 파렴치하고 의기양양한 꼭둑각시에게 환호를 보내는 것은 현실에서 도덕이 자신들에게 가하고 있는 무수한 구속과 금지에 대해 별로 큰 돈 들이지 않고 복수하는 것이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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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제훈의 소설은 위에서 소개된 추리소설의 기능들을 모두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다만 그것은 저 위의 세 번째 견해에서 피력된 것처럼 향수의 형태로 녹아들어 있다.  가령 ‘카이파’를 발견한 ‘오 박사’가 자신의 발견이 공적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과학계로부터 따돌림당하자, 스스로 입증하기 위해 실험자들을 모아 실험현장을 세팅하는데, 그 모양은 “최대 8인의 참석자들은 평등과 화합을 상징하는 원탁에 둘러앉는다.”(p.110)고 묘사되어 있다.
왜 뜬금없이 “평등과 화함을 상징하는 원탁”이라는 표현이 들어가는가? 그건 ‘오 박사’ 시도의 민주성을 암시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12세기 유럽 ‘기사도 로망’의 ‘원탁 회의’를 연상시킨다. ‘기사도 로망’의 가장 신뢰할만한 해석자 에리히 쾰러에 의하면 원탁 회의는 권력을 상실한 기사 계급의 과거 자신들의 영화에 대한 향수의 표현인 것이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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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에 의하면 추리 소설이 불가능한 세상이 바로 ‘토피아’ 즉 현실 세계이다. 작가는 미래 세계란 오늘에서부터 비롯된 것이고 미래에 이를수록 현실 세계는 완전한 통제를 향해 가고 있다는 예감을 은밀하게 독자에게 전달한다. 그래서 이 소설들에는 현재와 미래가 혼잡하게 뒤섞여 있다. 
아마도 모두(冒頭)에서 말했듯이 독자가 이번 소설집에서 예기치 않은 밋밋함을 느꼈다면, 이는 마치 ‘입시’, ‘마약’, ‘유괴와 야산 유기’ 등 오늘날 미디어들에서 넘쳐나는 그렇고 그런 사건들의 현실을 그대로 미래적 장치에 투입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인데, 그러나 다시 읽어 보면 여기에는 작가의 교묘한 반전의 씨앗이 파종되는 실제적인 장소로 해석할 수도 있다.
사실 이런 통제사회에 대한 전망은 조지 오웰의 『1984』(1949)을 위시해 빈번히 제기되어 온 것이고, 미래사회를 이런 시각에서 조명해 온 예술 작품은 프릿츠 랑의 「메트로폴리스」(1927)을 비롯해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것이다. 최제훈이 현재와 미래를 뒤섞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의 추리소설적 성향을 끝내 버리지 않았다는 것은 그가 ‘완전한 통제’를 뚫고 어떤 지평을 열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고 해석해야 하지 않을까? 
실로 이 작품들의 가장 큰 서사적 특징은 방금 얘기한 소재적이거나 주제적인 특성이라기보다는 사건에 휘말려 들어가는 방식으로 사건을 진단한다는, 특이한 체험적 사색의 양태이다. 작중 인물들은 이 완벽한 통제 안에 참여의 방식으로 내습해 들어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 통제 체제 안에서 무참히 희생당한다. 그러나 그들의 행동은, 그 참여 자체에 의해서, 이 통제 내부가 요동하고 있다는 것을 가리키며, 더 나아가 통제는 최종적인 승리를 이미 달성한 것이 아니라, 끝없는 일시성의 불안에 시달리며, 계속 통제를 뚫으려는 자유의 운동과 힘겨운 대결을 벌이고 있다는 것이다.
그 점에서 보면, 마지막 작품 「추출 혹은 작곡」은 작가의 의도가 가장 큰 활력을 얻은 경우라 할 것이다. 범죄자가 전적인 착각 속에 형사반장의 모습으로 사건의 매트릭스에 참여하여 자신의 범죄를 노출하고 마는 이야기가 기본 바탕인데, 이 매트릭스안에서의 이중의 가상 사건에서 범죄 적발 수법은 TME에서 TMC로 바뀐다. TME는 ‘전 기억 추출 Total Memory Extractoin’ 기법이고 TMC는 ‘기억 총체 구성Total Memory Composition’ 기법이다. 두 기법은 일종의 진화적 순서를 가지고 있다. TME는 기억의 오염으로 작동 불능이 될 수 있는데, TMC는 그 약점을 교정한 것이다. 그래서 TME에서 TMC로의 변화는 통제의 완벽성을 강화하는 듯하지만, 그러나 TMC는 사건 조작의 혐의에 걸릴 수 있다. 그래서 TMC는 ‘메타포’로만 기능하여 물증을 필요로 한다. 과학수사대가 장비를 들고 그 물증을 찾아야 한다.
그렇다면 이 찬란한 통제 기술을 자랑하는 추리 드라마가, 2000년대의 CSI와 뭐가 다른가? 미래에도 여전히 세계는 인간들을 통제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것이 아닌가? 또한 여전히 추리 소설은 그의 ‘존재이유’들을 ‘득템’하고 있고 있지 않은가?
최제훈 소설집의 매력은 세계의 위력과 생명의 무기력을 돋보이게 하고, 그것들의 진행을 점강적인 방식으로 보여줄수록, 그 안에 휘말려 든 독자는 자신도 모르게 그 거꾸로의 사태를, 즉 생명의 기력과 세계의 불안을 지각하게 된다는 점에 있다. 그걸 느낄 수 있는 독자는 고급독자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고급 독자는 오로지 고급 작품에만 반향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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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1) 이하의 기술은, Glenn W. Most & William W. Stowe, eds., The Poetics of Murder: Detective Fiction and Literary Theory, Harcourt Brace Jovanovic, 1983에 근거한다.

(2) Roger Caillois, 『놀이와 인간 - 가면과 현기증』, 이상률 옮김, 문예출판사, 1994, p.127.

(3) Erich Köhler, 『기사도 로망, 소설 속의 이상과 현 L'Aventure chevaleresque. Idéal et réalité dans le roman』, Paris: Gallimard, 1974[19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