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명교(정과리)의 문신공방

그가 선배 작가의 소설을 이어 쓴 까닭은?- 김종광의 『안녕의 발견』 본문

울림의 글/소설읽기

그가 선배 작가의 소설을 이어 쓴 까닭은?- 김종광의 『안녕의 발견』

비평쟁이 괴리 2024. 6. 27. 09:53

※ 아래 글은 '동인문학상' 제 55회 여섯 번째 독회에 대한 결과로서의 독회평이다. 조선일보 홈페이지에서도 읽을 수 있다. 신문사의 양해를 얻어 블로그에 올린다.

김종광은 대 작가 이문구와 동향으로서, 비슷하게 고향의 현장을 소설적 소재로서 취해 왔다. 이문구의 고향 소설은 철저한 지역성에 근거해 있다. 그 지역성은 타지 사람들뿐만 아니라 이웃 지역의 사람들도 해독하기 까다로운 방언의 광범위한 사용에서 선명하게 드러난다. 
이문구 문학의 지역성은 중앙 정부의 정책에 휘둘리는 지역 주민들의 애환을 생생하게 표출하였다. 생생하다는 말은 농촌의 상황을 정부와 농민 사이의 직접적인 대립으로 단순화하지 않고 다양한 상호작용을 통해서 갈등의 예각을 다면화하여 삶의 복잡한 실상을 체감하게 했다는 것을 뜻한다. 그 방향에서 보면, 그의 방언은 지역민들의 생활어로서 실제 삶의 증빙요소로 존재할 뿐만 아니라 지역민의 문제가 상호 이해의 난제와 맞물려 있음을 환기시킨다. 바로 이 소통의 어려움에 의해서 갈등들은 지역민들 내부에서 유발되기 일쑤이고, 또한 각종의 우연한 사건들을 방아쇠로 해서 예기치 않은 폭발을 일으키기도 한다. 그런 류의 특징적인 사건을 다룬 작품이 암소가 술을 먹고 죽은 소동을 다룬 「암소」(1968)이다. 
한데 김종광은 이 소설의 후일담을 써서, 최근 작품집 『안녕의 발견』(교유서가, 2024.04)의 첫 작품으로 싣고 있다. 「암소가 술 마신 집」이다. 그가 이 소설을 이어 쓰기로 결정한 데에는 강력한 의도가 엿보인다. 요컨대 이는 단순히 고향의 선배 작가에 대한 오마쥬만이 아니다. 그는 다른 이야기를 쓸 필요를 느꼈음이 틀림없다.
이문구의 「암소」는 비극으로 끝난다. 머슴이 빌려준 돈을 주인이 떼먹고 고리채로 신고해 버려 발생한 심각한 갈등은 화해의 조건이  되었던 암소가 술 먹고 죽음으로써 파국이 되고 만다. 김종광의 소설은 그 후일담을 다루고 있다. 
전편이 비극인 데 비해, 후일담은 희극이 된다는 것이 결정적인 변화인데, 그 계기는 「암소」의 머슴 ‘선출’이 애인 ‘신실’과 함께 고향을 떠난 데 있다. 후배 작가는 선배의 작품에 나온 한 가지 암시(그러나 작품에서는 전혀 사용되지 않은), 

“그는 아주 어려서부터, 그리고 군대에 있을 때에도 사주쟁이나 관상쟁이로부터 고향을 떠나야 하며 타관에 나가야만 비로소 성공하고 밥술이나 놓치지 않고 살리라는 말과 그 비슷한 예언 같은 소리를 들어온 터였다.”

에 착안해, ‘선출’을 출향시키고 그의 성공 내력을 추적하고 복각한다. 그리고 주인이었던 ‘황구만’의 아들, ‘공식’이 찾아와 옛집을 사달라고 요청을 하면서, 귀향하게 되는데, 귀향의 실질적인 주인공은 ‘선출’의 아내 ‘신실’과 ‘선출’이 전 부인과의 사이에서 낳은 ‘윤유’, 그리고 그곳에 남아 있던, 신실의 친구이자 ‘황구만’의 딸인 ‘양순’이다. 이들이 작품 제목에 해당하는 식당을 차리는 것으로 작품은 메지를 대니, 시야를 넓혀서 보면 이는 ‘금의환향’의 드라마다. 
이런 해피엔딩은 어떤 진실을 담고 있는가? 통상적으로 소설은 현실을 ‘문제화’해서 자각하고 성찰하게 하는 문화적 장치로 작동하기 때문에, 해피엔딩은 권장되지 않는다. 그러나 김종광의 소설에서는 그럴 이유가 있어 보인다.
우선 김종광 소설의 주인공들은 방언을 쓰지 않고 비속어에 가까운 막말로 삐쭉빼딱하게 대거리를 하듯이 말한다는 점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방언과 비속어는 그 말의 특이성에 의해서 현실과의 마찰을 가리키는 표지로 기능하기 일쑤이다. 그런데 앞에서 말했듯, 이문구의 방언이 소통의 난맥이라는 정황을 가리키는 상징적 지표로 쓰였다면, 김종광의 비속어들은 현재의 소통 방식을 깨고 새로운 인간관계를 겨누는 소통의 인화물질로 작용한다. 게다가 비속어는 그 자극성에 의해서 특별한 ‘극적 상황’을 늘 떠올리게 한다. 런던의 역사와 도시 문화에 정통했던 소설가 피터 에크로이드Peter Ackroyd는 워즈워드Wordsworth를 원용해, 런던의 비속어(slang)를 가리켜 “모든 것은 오로지 쇼를 보여주기 위해 존재하고, 도시는 일종의 어릿광대가 되는 강렬한 ‘연극성’ (Jeremy Gibson, Julian Wolfreys ed., 『피터 에크로이드: 장난기 가득하고 미로투성이인 텍스트 Peter Ackroyd: The Ludic and Labyrinthine Text』, London: Palgrave Macmillan UK, 2000, p.257.)”의 한 요소라고 지적한 적이 있는데, 김종광식 인물들의 거친 대거리가 바로 이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덧붙이자면 프랑스의 누로로망 작가 미셸 뷔토르 역시 “제임스 조이스가 특수어, 은어, 토막난 외국어들, 의성어‧의태어들을 상시로 사용”한 것은 “언어를 과장”해 “침묵 속에 빠져 있는 사물들을 선명히 드러내기 위한 것 (Michel Butor, 「조이스 열도 Archipel Joyce」『근대성에 관한 에세이 Essai sur les modernes』, Paris: Gallimard, 1960,1964, p.255 )”이었다고 풀이하였다.
여기에서 언어의 연극적 과장은 단순히 감각적 자극을 노리는 것도 위악적 표현도 아니다. 필자가 보기에 이는 김종광 소설에서 인물들을 현실에 확고하게 정착시키는 매개체로 기능한다. 그들은 막말을 통해서 상황을 동요시키고 상황의 변화를 유도한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상황 속의 자연인으로서 당당히 진입한다. 진입의 성공 후에 점잖은 태도를 회복하는 것은 필수적이다. 이때 상황의 동요를 일으켰던 계기들은 정착인의 삶 속에 내장된다. 즉 이 정착인은 저 옛날의 수렁에 발을 담근 정착민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를 모색하는 정착민, 즉 정착 자체가 끝없는 이주를 예비하는 그런 존재라는 것이다.
작품의 시간적 전개에 비추어 보면, 이는 뜨내기로부터 정착민으로의 변화 과정이다. ‘선출’이 머슴으로 살았다는 사실이 이 변화 과정의 시간 벨트에 미묘한 어긋남을 준다. 즉 ‘선출’이 고향에 있을 때 그는 이미 ‘뜨내기’이다. 그런데 그는 자신의 뜨내기스러움을 자각하지 못한 상태이다. 그러다가 고향을 떠난 시간부터 뜨내기적 삶의 자각적 실천이 시작되는데, 그 출발은 동시에 정착인이 되어가는 시간대의 기점이 된다.
그래서 시간대의 변이는 ‘정착인 → 뜨내기 →정착인’이라는 상투적인 이행이 아니라, ‘뜨내기(비자각적) → 뜨내기(자각적) → 정착인(변화를 내장한)’의 절차가 된다. 즉 물리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이 시차를 두고서 겹쳐져 있는 모양이다.
이런 겹침은 인물을 넘어 시대 자체의 성격을 규정한다. 즉 첫 번째 시간대에서 그저 ‘선출’만이 뜨내기인 것이 아니다. 훗날의 파탄을 다 살피고 보면, 실은 주인 노릇을 한 ‘황구만’ 역시 뜨내기에 지나지 않는다. 모두가 뜨내기였는데, 누구는 여전히 멍청한 뜨내기로 남았고 다른 누군가는 자신의 뜨내기성을 자각하고 그 주어진 운명을 개척하기 시작했다. 그 자각적 실천은 뜨내기를 정착인으로 유도한다. 시간이 한참 지난 후에도 맹한 뜨내기들은 여전히 있지만, 의식이 또렷한 정착인들도 일정한 군을 이루게 되었다. 
이 시간대 전체는 1965년부터 코로나 이후까지 걸쳐져 있다. 그것은 이 작품의 사건이 한국 현대사와 평행을 이루고 달려왔다는 것을 가리킨다. 작품의 전개에 미루어보면 작가는 제3공화국에서부터 한국인의 뜨내기적 삶이 시작되어 ‘IMF 구제금융 시기’에 자각적 뜨내기들의 본격적인 진출을 보았으며, 코로나 이후 변화를 내장한 정착인들의 세계가 형성되고 있다고 생각하는 듯한데, 구체적인 기점에 대한 작가의 속내에 관해서는 좀 더 살펴봐야 할 것 같다.
다만 이 소설집을 통해서 독자가 읽는 것은 한국인의 현대사를 상당부분 차지했던 뜨내기적 삶을 이제는 청산해야 한다는 분명한 메시지이다. 뜨내기적 삶이란 때마다의 변덕에 의해 작동된 임기응변과 투기의 삶이다. 그 삶을 지탱하는 것은 불타오르는 생존 욕망과 억척스러운 부지런함과 끊임없는 모방이다. 그러나 그 삶에는 축적이 없고 창안이 없으며 당연히 자기 갱신이 없다. 변화하는 정착인이란 그 반대의 형상을 떠올리면 된다. 한국의 현대사는 이 두 유형의 집합적‧군중적 교체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
작가는 글쓰기의 무의식 속에서 이 교체 과정에 계속 기름을 부으면서 선배가 파국으로 직면했던 세계를 희극으로 바꾸었다. 이 희극 속에 진실이 있는지는 두 방향을 통해서 확인해야 할 것이다. 하나는 지금, 이곳의 역사적 전개로부터. 코로나 사태 이후 한국 사회는 지금 어느 단계에 와 있는가? 우리가 확인하는 것은 여러 부면들의 지독한 비균질성이다. 어떤 부면은 느리지만 꾸준히 불굴의 전진을 계속하고 있다. 그러나 다른 부면에서 사람들은 여전히 거머리들처럼 바글거리며 거짓의 깃발들을 추종하면서 우왕좌왕하고 있다. 형이상학의 층위로 갈수록 그런 현상이 유독 두드러진다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여하튼 이런 현실에 대해 작품은 거울로 작용할 것이다. 
다른 하나는 작품 그 자체 안에서 진실을 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교체 과정이 실제로 확인되기 위해서는, 연극적 과장이 범상한 사실들로 환원되어야 한다. 말의 힘은 사실들의 바닥 중력으로 옮겨져야 할 것이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연극의 활력 자체가 바닥의 중력으로 작용해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소설의 문체는 어떤 변화를 치러낼 것인가? 작가가 숙고할 문제이다.
‘역사는 두 번 되풀이된다’는 마르크스의 유명한 문구로 흔히 알려져 있다. 정확한 대사는 다음과 같다. “헤겔은 어디선가 위대한 역사적 사건들과 인물들은 두 번 되풀이 된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런데 그는 다음 사항을 덧붙이는 것을 잊었다. 처음에는 비극이지만, 다음번에는 소극(笑劇)이라는 것을.”(「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 
이 대목을 통해 이 저명한 진보주의자의 무의식 속에 역사에 대한 냉소적인 심성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고 한다면, 화를 낼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소극’의 잡다한 장면들을 나열하고는 “19세기의 사회혁명은 과거로부터가 아니라 오로지 미래에서 영감을 받는다. 과거와 관련되어 있는 모든 미신을 벗어 버리고서야 비로소 19세 기의 사회혁명은 시작될 수 있다. [...] 과거의 혁명에서는 형식이 내용을 압도하였다. 19세기의 혁명에서는 내용이 형식을 압도한다.( 칼 마르크스, 『프랑스 혁명사 3부작』, 허교진 옮김, 소나무, 1987, p.49)”라고 썼다는 것은 그가 혁명과 역사를 대립적인 것으로 이해했다는 것을 가리킨다. 
이에 비해 김종광의 ‘소극’은 다른 형식을 제시한다. 그의 작품은 과거의 형식이 내용을 압도하는 것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신생(혁명)의 내용은 과거의 형식을 끌어 안고 그것을 변용할 때 창출될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김종광의 과장된 대거리는 이문구의 충청도 사투리의 변용이지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다. 또한 그가 선배를 추앙하며 이어 쓰기를 한 까닭도 거기에 있을 것이다. 역사와 혁명, 혹은 전통과 혁신의 관계에 대해서 새삼 성찰을 촉발한 것도 이 작품집의 미덕이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