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명교(정과리)의 문신공방
일상적인 것과 형이상학적인 것 -정찬의 「슬픔의 노래」 본문
정찬의 「슬픔의 노래」(『현대문학』 5월호[1995])는 두 가지 점에서 흥미를 끄는 소설이다. 하나는 권력과 언어의 관계에 대해 ‘집요하게’ 탐구해 온 이 작가의 붓이 어떤 방향으로 휘어지고 있는가를 엿볼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 작품이 ‘80년 광주’를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우선, 후자의 측면도 작가의 변화를 암시한다는 것을 지적해두기로 하자. 왜냐하면 정찬은 본래 광주에서 소재를 취한 작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완전한 영혼」 이래 일련의 작품을 통해 그는 광주에 접근하고 있다. 그것은 90년대 들어 급변한 사회적 분위기에 휘말리면서 광주가 서서히 실종되어 가고 있는 추세에 비추어보면(임철우를 비롯한 몇몇 작가만이 그것에 끈질기게 저항하고 있다) 더욱 특이한 일에 속한다. 그는 마치 열차를 갈아타기 위해서 플랫폼을 이동하는 군중들의 물결을 거꾸로 헤치고 가는 기이한 승객과도 같다. 그는 왜 거꾸로 가는 걸까? 그것을 본래 타지 않았던 이 승객이 멈춘 열차에서 찾아야 할 짐이 있었던 것일까?
이것이 단순히 소재의 변화만이 아님은 작품의 문체를 보면 알 수가 있다. 「말의 탑」, 「수리부엉이」로부터 시작해 작가는 줄곧 권력과 언어의 원형적 관계를 탐구해왔다. 무릇 모든 원형 탐구는 형이상학적 본질에 육박하는 시도이고, 그것은 제재, 어조에 두루 영향을 미쳐, 그의 언어는 그가 그것을 문제삼을 때조차 신의 어조를 닮아 있었고, 그의 제재는 대체로 고대 역사 혹은 그에 걸맞은 상상적 공간에서 길어올려졌다(고대란 원형에 가장 가까운 시대인 것이다). 그런데 「완전한 영혼」과 더불어 작가는 고대로부터 현재로 시선을 돌리기 시작한다. 더불어 그의 원형 탐구는 불가피하게 일상성의 지평으로 하강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의 어조도 신(혹은 악마)의 어조로부터 인간의 범상한 어조로 급격히 추락하기 시작한다. 「완전한 영혼」에서 화자가 글을 못쓰는 선배와 나누는 대화를 회상해보라. 거기에는 절필의 권태가 그대로 투영된 듯한 나른하고 심란스러운 말들이 어색하게 부유하고 있었다.
이번 작품 「슬픔의 노래」 역시 이 평범한 일상적 장면을 중앙 무대로 삼는다. 폴란드라는 이국적인 소재와 그곳의 민요가 서두를 장식하면서 독자는 정찬 특유의 신비한 세계를 또다시 접하게 되리라는 기대를 갖는다. 그러나 곧 이어서 취재 기자와 마중나온 사람들 간의 만남에서부터 기대는 꺾이기 시작한다. 그 만남의 장면은 긴장이 풀어진 채로 평범한 일상적 정경을 산문적으로 드러낸다(게다가 이 취재 여행은 동구권 개방과 더불어 많은 작가들이 최근 들어 즐겨 취하는 제재이다. 지난달에 함께 발표된 오탁번의 「1억년 전의 새 발자국」, 윤대녕의 「피아노와 백합의 사막」(이상, 『문학사상』 5월호)도 비슷한 제재를 다루고 있다. 물론 그들이 다루는 방식은 저마다 다르다).
정찬은 이제 신적인 것에 대한 문제의식을 버리려고 하는 것일까? 그러나, 그는 사실 원형에 대한 집요한 시선을 결코 놓은 적이 없었다. 그것은 이 평범하기 짝이 없는 일상적 정경으로부터 문득 튀쳐나오기 시작해서 인물들을 기이하고 광태스러운 분위기로 휘감아버린다. 작가는 아우슈비츠를 제시하고 또 그것을 광주로 연결시키면서 권력의 원형적 얼굴에 다시 육박한다. 그렇다면, 거꾸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작가는 그의 탐구의 일상적 지점을 찾기 시작하였고 그 한 유적지로 광주를 발견하였다고. 그것은 그의 원형 탐구의 절정을 이루는 「얼음의 집」이 7,80년대 한국의 강압정치를 상징적으로 집약하는 ‘고문자’의 삶을 발견한 것과 같다.
그러나, 「완전한 영혼」 이후 「슬픔의 노래」에까지 이르면서 나타나는 일상성은 「얼음의 집」에서 나타난 일상성과는 아주 다르다. 후자의 일상성은 그 자체로서라기보다는 권력의 얼굴에 접근하기 위한 일종의 상징적 매개자로 등장한다. 그것의 소재는 엄격하게 말해 ‘고문자’의 삶이 아니라 ‘고문’의 삶이다. 고문, 그것이 고문자를 지배하고 있었던 것이며, 따라서, 그곳의 등장인물은 생활인이라기보다는 관념의 권화로 나타난다. 그에 비한다면, 「완전한 영혼」이나 「슬픔의 노래」의 인물들은 구체적인 생활 표지들을 가지고 있는 생활인들이다. 그들은 직장에서 인정받기 위해 인터뷰보다 사진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고, 집시의 술집에서 밤새도록 술을 마시는 낭만적 감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다(낭만성이야말로 생활인의 가장 두드러진 표지이다. 낭만이란 초월적 진실의 ‘퇴화’이며, 퇴화된 진실을 즐기는 사람은 생활에 충실한 사람들뿐이다).
그러니까 「슬픔의 노래」에서는 지극히 일상적인 것과 지극히 형이상학적인 것이 각각 온전한 제 모습을 한 채로 만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어색한 만남, 부조화한 만남을 연출하며, 이 부조화한 어울림으로부터 어떤 그로테스크 혹은 괴물성이 불현듯 솟아나는 것이다. 같은 잡지에 발표된 한동림의 「조난」과 비교해보면 그 괴물성이 어떠한지를 금세 느낄 수가 있다. 신진 작가의 패기로 존재의 진실에 정면으로 접근하고 있는 「조난」의 경우는, 그것이 정면 접근인 만큼 비장성을 동반하고 있다. 심각함이 어떠한 평범함(가령, 등산을 그만 두라는 부모의 성화)도 용납하지 않으면서 줄곧 유지되는 가운데 발생하는 긴장의 미학적 이름이 바로 그 비장성이다(지나가는 길에, 패기 있는 젊은 작가를 만난 반가움을 덧붙여둔다). 그에 비해, 「슬픔의 노래」를 지배하는 분위기는 비장함이 아니라, 그 비장함이 일상성과 만나 발생하는 기이한 어색함이다.
이 기이한 부조화를 두고 괴물성이라고 한다면, 그것이 실로 괴물을 잉태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괴물을? 정찬의 변화의 핵심적인 의미가 여기에 놓여 있다. 그 괴물은 바로 권력의 행사 그 자체로부터 태어나는 숙명적인 생명의 얼굴을 말한다. 권력의 끝간 데가 결국 어디일까의 문제는 작가가 줄곧 제기해 온 문제였다. 「얼음의 집」에서 그것은 두 개의 절을 가진 하나의 문장으로 요약된다. 권력은 끝없이 변신하며, 그 변신의 끝은 삶에의 얽매임이다, 라는 것이 그것이다. 권력은 살아남기 위해 계속 자기 변화를 시도하는데, 그 과정은, 그러나 권력이 삶을 지배하는 것으로부터 삶에 의해, 즉 살아남음의 욕구에 의해 지배당하는 과정이라는 것이었다. 그것을 「얼음의 집」은 ‘종이학’이라는 이미지로 아주 선명하게 보여주었다. 권력의 차가운(냉혹한) 얼굴은 종이학의 차가운(얄팍하고 금세 구겨질) 허상적 이미지로 말라버린다. 그것은 권력에 대한 가장 큰 부정을 보여준다. 그 부정은 어떠한 긍정도 담고 있지 않은 부정 그 자체였다. 권력으로부터 권력으로 이어지는 길의 불가피한 자기 소멸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 부정으로부터 어떤 긍정이 태어날 수는 없는가? 그 질문을 축으로 작가는 「완전한 영혼」에서부터 선회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 작품에서 작가는 순결한, 그러나, 미친, 아니 미칠 수밖에 없는 영혼을 보여준다. 파멸로서 완전한 영혼, 다시 말해, 완전한 무로서 존재하는 완전한 전체를 보여준 것이다. 그럼으로써 작가는 부정의 방식으로 드러나는 긍정에 접근한다. 「슬픔의 노래」는 다른 길을 보여준다. 이번에 보여주는 길은 부정성 그 자체로부터 솟아나는 긍정을 다룬다. 그러니, 솟아나는 것은 두 개의 얼굴을 가진, 아니 차라리 부정성의 포기 위에 전혀 상반된 고갱이가 고개를 내밀고 있는 그런 모양의 괴상한 괴물이다. 그 괴물이 말하는 바에 의하면 아우슈비츠를 방문해 그 영혼을 위로하는 우리의 행위도 결국 얄팍한 감상의 종이학에 지나지 않는다. 좀더 진실하려면 정말로 정면으로 접근해야 한다. 악에 분노하고, 선에 슬퍼하는 모든 것은 악의 영원한 존속을 낳을 뿐이다. 그러기보다 악의 뿌리로 접근해야 한다. 악의 뿌리 그 자체가 생명의 힘으로 전화하는 길을 찾아야 한다.
작가의 ‘광주’ 탐구는 여기서 또 다른 의의를 얻는다. 지금까지 많은 작가들이 광주를 다루어왔다. 때로는 혁명적(그러나 도식적인) 역사의식의 관점에서(홍희담의 「깃발」), 때로는 전면적 가해성의 두려움과 반성의 차원에서(이순원의 「얼굴」), 혹은 광주가 낳은 광기의 사회학을 탐구하는 방향(임철우의 「사산하는 여름」)으로. 그리고 임철우가 지금 시도하고 있는 중인 역사적 규모의 총체적 드러냄으로. 그리고, 어느 날부터인가, 일반인들 속에서 광주는 잊혀져가고 있다. 정찬은 이 실종 중의 광주에 또 하나의 해석을 추가한다. 생명의 분출이라는 차원에서. 마치 실종으로부터 부활로 그것을 되돌리려는 듯이.
1995. 6, 현대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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