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명교(정과리)의 문신공방
악을 드높이는 문학의 곡예 -정찬의 『완전한 영혼』 본문
지난해[1992]의 문학계에서 가장 두드러진 현상의 하나는 이른바 상업주의 소설이 당당히 제 권리를 주장하며 문화의 장에 뿌리를 내렸다는 것이다. 말을 바꾸면 소설이 완벽한 소비 상품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 상품은 알짜배기 상품이어서 즐거움만을 주는 것이 아니라 감동도 주고 긍지도 주며 지식도 주고 교훈도 준다. 아니, 준다고 주장되고 그렇게 받아들여진다. 다만, 그 소설이 주지 않는 것이 단 하나 있는데, 그것은 고통이다. 분명 그 소설들에도 난관과 시련은 있으나 그것은 훗날의 또는 마음의 영광을 보상하기 위한 중간 절차일 뿐이고, 그곳에 몽롱한 방황은 있으나 가슴을 찢고 머리를 빠개는 괴로움은 없다. 글쓰는 괴로움은 있는지 모르겠으나(원고지 메우기도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글쓰기에 대한 고뇌는 없으며, 책읽기의 지루함은 교양을 쌓는다는 데 대한 희망이 충분히 상쇄해줄 만하다.
좀 더 세밀한 사회학적 분석을 해봐야 알겠지만, 상업 출판사들의 대대적인 광고 공세와 독서층의 확산(배운 주부들이 몰려오고 있다), 그리고 소비 사회 혹은 기호 교환 사회로의 본격적인 진입 등이 한데 어우러져서 만들어낸 것으로 보이는 그 놀라운 현상은 한편으론 역사의 무게가 점차 사람들의 몸으로부터 떠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면서, 다른 한편으로 문화의 중심이 문학으로부터 음향․영상 매체로 이미 이동해 있다는 짐작을 다시금 확인시켜준다(왜냐하면, 책읽기의 현상조차 후자에 의해서 결정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들의 배후 자체는 좋을 것도 나쁠 것도 없으며, 슬퍼하거나 노여워할 일도 아니다. 그것은 단지 불가피한 역사의 추이일 뿐이다. 그리고 역사에 대한 배반을 역사가 감행하고 있는 것이라면, 산 역사의 이름으로 그것의 의미를 묻는 작업들도 언제나 있게 마련이다.
물론 묻는 방식들은 아주 다양하다. 지난해 거의 한국문학작품을 읽지 못한 내 기억 속에도 적지 않은 소설들이 여전히 미열을 발생시키며 남아 있다. 얼마 전에 우찬제도 지적한 바 있지만, 정보 산업사회와 발맞추어 가면서 새로운 역사의 가능성을 야심차게 타진하고 있는 복거일의 『파란 달 아래』가 전자통신망 ‘하이텔’을 통해 연재되었고, 역사가 지나간 자리에도 삶이 ‘남아 있다’는 것을 아름답게 묘사한 최윤의 『회색 눈사람』과, 아마도 우리 문학사상 최초로 ‘모독’의 탄생을 보여준 최시한의 「손」이 있었다. 그리고 소설의 본령을 지켜내기로 작정한 듯이 보이는 김윤식 교수의 끈덕진 현장 비평 작업이 있었다.
그 가운데, 지난해 말에 출간된 정찬의 『완전한 영혼』은 역사의 추이에 대해 가장 거꾸로 가는 방향에 놓인다. 그의 소설의 정신적 지평은 고대 서사시와 맞닿아 있다. 그는 영혼과 육체가 수직으로 교통하는 시대를 꿈꾼다. 그의 소설은, 그러나, 그러한 꿈을 달게 꾸지 못한다. 작가는 그러한 시대가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쓰게 인정하는 데서 출발하여, 그로부터 거꾸로 그 시대를 향해 거슬러 올라간다. 물론 그 길은 불가능한 꿈의 길이고, 따라서 먹장구름 사이로 나타났다 사라지는 달을 향해 애타게 손짓만 하는 길이다. 그 불가능성에 대한 숙명적 깨달음이, 그러나, 그의 소설의 동력이다. 그는 ‘그것이 운명이라면’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것이 운명이라면, “평생의 삶을 짊어진 정신”으로 그 운명을 받아들이겠다고 말한다.
정찬의 소설이 관념적인 것은 그러한 운명을 깨달은 자가 택할 방법이 그것밖에 없기 때문이다. 몸의 혀는 하나지만, 마음의 혀는 무수히 많다. 그는 관념의 혀로 말한다. 그러나 그 혀는 육체를 핥고 쑤신다. 그 관념의 혀는 도덕가의 그것처럼 딱딱하지 않고 이론가의 그것처럼 차지도 않다. 그것은 뱀처럼 널름대고 갱엿처럼 끈적거리며 창처럼 찌른다. 그 다형다모의 혀를 가지고 작가는 그의 꿈을 되찾는 대신 그것을 동강낸 욕망과 권력의 밑자리와 계보를 세운다. 홍정선의 ‘해설’ 제목을 빌자면, ‘권력과 인간에 대한 집요한 탐구’가 그의 소설 전체를 이룬다.
때때로 작가는 권력과 욕망의 세계에 저항하는 현실적인 대안을 발견하는 듯하다. 표제작 「완전한 영혼」에 의하면 그것은 모든 것을 수락함으로써 욕망을 정화하는 욕망이다. 그러나 나는 그가 답을 발견하는 곳에서보다 질문을 더욱 얽히게 만드는 곳에서 더욱 눈이 머문다. 「얼음의 집」은 그 질문이 가장 복잡하게 얽혀 풀릴 길 없는 분규를 일으키고 있는 작품이다. 수난당하는 영혼을 주인공으로 내세우지 않고 권력의 하수인을 주인공으로 내세움으로써 가능했던 것으로 보이는 그 질문의 착종과 확산은 우리에게 세 가지 중요한 전언을 들려준다.
그 하나는 탐욕과 권력에도 사상이 있다는 것이며, 그 둘은 권력과 원한은 꼬리를 물고 있다는 것이고, 그것을 풀기 위해서는 변신의 곡예가 필요하다는 것이 그 셋이다. 첫 번째 이야기는 선과 악의 이분법, 즉 권선징악의 수준을 넘어설 때 현실 탐구가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며, 두 번째 이야기는 권력의 욕망에 대해 분노하는 데에 해방의 길이 있지 않으며(왜? 권력에 분노하는 욕망이 권력을 수립하고자 하는 욕망이니까), 욕망을 끊는 데에 해탈의 길이 있지도 않다는 것을(왜? 그 또한 욕망의 이름으로 말해지니까) 보여주고, 세 번째 이야기는 그러니 문학은 욕망의 탈들을 거듭 쓰고 욕망을 평생 집요하게 물고늘어질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문학은 악의 드높임이고 위선이고 곡예이다. 그렇게 살 수밖에 없다. 그러니, 어찌할 건가? 그 물음이 책 읽는 자의 몸을 진저리치게 만든다.
1993. 1. 6, 한국일보, 권력과 인간에 대한 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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