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명교(정과리)의 문신공방
기억의 윤리는 과거를 미래로 펼친다-최윤의 「워싱톤 광장」 본문
잊혀진 사실을 찾아가기는 최윤 소설의 특징적 주제이다. 등단작품인 『 저기 소리없이 한 점 꽃잎이 지고』에서부터 『회색 눈사람』을 거쳐 오늘 소개되는 「워싱턴 광장」에 이르기까지 작가는 지속적으로, 그러나 언제나 첫 경험의 표정으로 무엇인가를 돌이켜보고 있다. 잊혀진 사실을 찾아간다고 했지만, 엄격하게 말하자면, 그는 찾아간다기보다는 되살려낸다. 왜냐면, 그에게 잊혀진 과거는 망각의 강을 건너지도 않았고, 역사의 시간대 저쪽에 요지부동으로 놓여 있는 고고학적 과거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가 돌이켜 떠올리는 그것은 명백하게 우리의 기억 속에 남아 있어서, 언제나 현재를 향해 엄습한다. 다만, 어찌된 일인지 그것들은 시커먼 안경을 쓴 것처럼 흐릿하게 지워져버려서, 결코 또렷한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혹은 거꾸로 말할 수도 있으리라. 현재는 그의 과거를 은밀히 불러오고는 동시에 그것을 외면한다. 추억하면서 동시에 잊는다. 왜?
기억해야 하지만 기억해서는 안될 일이 일어났기 때문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억되기 때문이다. 그때․그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다. 그 일에 나는 알게 모르게 관련되어 있었지만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못했다). 그것이 부끄러움과 두려움을 동시에 유발한다. 나의 기억은 그 두 감정의 복합체이다. 그 심리적 표리는 그러나 완강히 등을 돌리고 있어서 결코 화해하지 않는다. 부끄러움은 내가 진 부채를 갚아야 한다는 마음의 움직임을 낳지만, 그러나, “기억의 무서운 물살”에 빠져들기란 정말 두려운 일이다. 나는 과거를 불러 놓고 돌아선다. 그러나 불려온 과거가 왜 가만있겠는가? 현재에 대한 과거의 복수가 어느새 진행되어 돌아서는 그의 뒤를 잡아채는 것이다. 그 복수는 뭉클한 애정의 복수이다. “믿을 수 없게” 도래한 과거는 그에게 사건을 제시하면서 윽박지르는 것이 아니라, 사건을 에워싸고 흐르는 그때․그곳에서의 나의 삶을 들려주는 것이 아닌가? 그때․그곳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게 아니라, 무슨 이야기가 있었던 것이다. 순간의 사건이 아니라 덩굴 같은 삶의 내력이 있었던 것이다. 그 삶의 내력이 펼쳐질수록 그리움이라는 가장 오래된 것이 가장 새롭게 새록새록 피어나온다. 피어나면서 부끄러움과 두려움 둘레에 끈끈이처럼 엉겨붙는다. 화해할 수는 없더라도 결코 헤어지지 못하도록. 그는 지금․이곳에서 그때․그곳의 삶을 되살 수밖에 없다. 현재는 무한히 멀어지고 과거가 무한한 미래로 펼쳐진다.
최윤의 소설에서 문체가 중요한 것은 그것이 과거를 되살려내는, 혹은 과거가 되살아나는 과정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문체 스스로가 부끄러움과 두려움과 그리움이 한데 엉긴 무엇이다. 그것은 과거를 향해 난 통로, 아니 거꾸로 돌려진 영사기처럼, 뒷걸음질치면서 사라지는 언어이다. 그러나, 언어가 지워지는 자리에는 백지가 있는 것이 아니라, 뒤엉킨 느낌이 있다. 부끄러움과 두려움과 그리움이 엉겨 칙칙하고 풍요로운!
1993. 11, 『’93 현장비평가가 뽑은 올해의 좋은 소설』, 현대문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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