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명교(정과리)의 문신공방
삶의 의미라는 괴물이 출몰하는 그곳-이창동의 『녹천에는 똥이 많다』 본문
이 특이한, 특이하다기보다는 지저분하고, 지저분하지만 어쨌든 그것을 누지 않고는 살 수 없는, 그래서 독자를 무척 엉거주춤한 의식으로 몰아넣는 것이 소설의 제목에 등장했던 적은, 내 기억으로는, 예전에 유정룡이 「똥」이라는 제목으로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당선한 이래, 두 번째다. 작가는 그것을 그의 두 번째 작품집의 표제로 삼았는데, 거기엔 까닭이 없지 않아 보인다. 내가 그것을 먹으로 삼아 『녹천에는 똥이 많다』의 탁본을 떠 읽은 것이 있다면, 녹천의 ‘똥’은 풍자의 매개물이나 해학의 대상이 아니라, 상징적 사유의 표지라는 것이다.
겉으로 보아, 이창동의 소설은 사실주의적 계열에 속한다. 그는 우리 현실의 정치․사회적 문제에 휘말린 사람의 삶을 사건의 추이를 좇아 기술한다. 그러나, 핵심은 사건의 기록에도, 그 사건에 휘말린 사람들의 고난에도 있지 않다. 작가는 모든 사건들의 표면을 넘어서 그 뿌리에 놓여 있는 것으로 되풀이해 되돌아간다. 인물들의 의식은 그 뿌리, 즉 삶의 의미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강박되어 있다.
물론 지구상의 어느 소설이든 삶의 의미를 추구하지 않는 것은 없다. 그러나, 『녹천에는 똥이 많다』에서 삶의 의미는 추구의 대상이 아니다. 인물들은 삶에서 의미를 발견하지도 않고 의미를 통해 삶을 이해하지도 않는다. 다만, 저기에 의미가 있다. 그리고, 이곳에서 삶은 저질러진다. 의미와 삶은 그렇게 멀리 있다. 그러나, 삶을 저지르고야 말게 만드는 것은 의미이다. 문득, 삶의 아득한 저편에 의미가 놓여 있다는 느낌에 사로잡히자마자, 인물들은 허무로 몸부림치고 곽란을 일으킨다. 그러니까, 『녹천…』에서 삶의 의미는 의미가 아니라 차라리 상징이다. 그것은 결코 잡히지 않는, 그러나, 눈앞에 생생해서 온 몸에 소름이 돋는, 불가해한 생물이다. 그것은 『산해경』에 나오는 짐승과도 같다. 그것이 나타나면, 그 고을에 미친 사람들이 부쩍 늘어난다.
그러나, 이 현대 소설 속의 상징은 신화세계의 그것처럼 빛나거나 현묘하지 않다. 그것은 끔찍하게 살아 있고 시커멓게 널려 있다. 그런데도 그것의 특징의 하나는 도피적이라는 것이다. ‘민주주의’거나 ‘민중의 자각’이거나 ‘독재 정권’이기도 하고, 또는 ‘등불’이거나 ‘쇠사슬’이거나 ‘똥’이라는 잡다한 이름을 가진 그 상징물은 쉬지 않고 도피한다. 겉으로야 인물들이 거기에서 도피하려고 용을 쓰지만, 실제 인물들은 달아나지 못한다. 일단 그것이 덮치면 인물들은 포충망에 잡힌 나비처럼 날개만 망가뜨릴 뿐이다. 정작 달아나는 것은 그것이다. 그것에 사로잡힌 인물들이 마침내 그것을 수락하려는 순간, 그것은 이미 저만큼 사라진다.
그것의 또 하나의 특징은 감염적이라는 것이다. 그것에 대한 강박관념은 아버지에서 아들로, 시동생에서 형수로, 인물에서 화자로 옮아 붙는다. 작품 안팎에 두루 미친 돌림병이 도는 것이다. 그러나 그 전염성 질병은 사람들을 하나로 만들지 않는다. 그것은 끊임없이 불화를 야기하니, 그것의 마지막 특징은 이간적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에 들린 사람들은 자신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미쳤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희한한 돌림병이 5리쯤 북으로 퍼져나간 쪽에 이창동이 있다. 이창동은 물론 작가의 이름이다. 그러나, 소설의 작가는 개인이 아니라 장소이다. 실제로, 청량리-의정부 간 국철의 녹천 다음 역이자 지하철 4호선과 만나는 역의 이름이 창동이긴 하지만, 여기서 작가가 장소라는 것은 그것의 비유가 아니다. 굳이 말한다면, 거꾸로이다. 작가는 작품의 곪은 자리, 삶의 의미라는 괴물이 출몰하는 그곳, 녹천에서 엉거주춤하게 비켜서서 그곳과 다른 삶의 자리들 사이에 무수한 질문을 태어나게 하는 장소이다. 그 장소도 이미 절반은 감염되어 있다. 아니, 감염되지 않았으면 그곳은 창동이 아니다. 왜냐하면, 삶의 의미에 강박되지 않은 곳에 삶의 의미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작가여, 혹은 『녹천…』을 읽고 덩달아 병들었을 독자여, 깨어날 생각말고 더욱 미치시라, 화해할 생각말고 계속 이간질하시라. 그곳에 이미 깨우침과 화해가 깃들어 있으니.
1993. 2. 3, 한국일보, 삶의 의미라는 괴물 출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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