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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의 글

순자를 읽으니 마음이 착잡하다

비평쟁이 괴리 2020. 10. 6. 10:36

() 신동준이 역주(譯註)해서 펴낸 순자론(학오재, 2009)을 읽다가 오늘의 한국 정치 현실을 풍자해서 유명해진 어떤 글의 생각과 맞물리는 게 많아, 이게 불변하는 세상의 풍경이려니 하는 생각에 마음이 허탈해진다. 한 대목을 인용한다.

 

난세의 징후는 이와 같다. 사람들이 옷은 조(組: 문양이 있는 넓은 띠로 사치를 의미)하고, 그 용모는 모두 부인을 모방하고[1], 그 풍속은 음란하고, 그 심지는 이익만을 추구하고, 그 행동은 열악하고, 그 성악(聲樂: 음악의 곡조)은 험악하고, 그 문장(文章)은 특채(慝采: 내용이 간특하고 辭藻가 화려함)하고, 그 양생(養生: 생활)은 무도(無度: 절도가 없음)하고, 그 송사(送死)는 척묵(瘠墨: 簡薄, ‘墨’은 묵자를 상징)하고, 예의를 천시하며 용력(勇力)을 귀하게 여기고, 빈궁한 사람은 도적이 되고, 부유한 자는 남을 해치는 자가 된다. 치세는 이와 완전히 상반된다.(제 20절 「악론」, 제 5항.)

 

옛날이나 지금이나 세상은 끔찍하게 추악하고 끝없는 추락 속으로 빨려드는 것처럼 보인다. 조금이나마 진지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무기력에 절망해서 점점 청맹과니를 자처하게 된다.

내가 최근의 어떤 글을 떠올린 것은 이런 상황 인식이 아니라, 거기에 분개해서 순자가 쓴 시 때문이다.

 

천하가 불치(不治: 不寧)하여 궤시(佹詩: 激切한 시로 여기서는 ‘激憤歌’)를 부르고자 한다. 천지가 역위(易位: 자리를 바꿈)하고, 사시(四時)가 역향(易向: 차서를 바꿈)하고, 열성(列星)이 운추(殞墜: 隕落)하고, 단모(旦暮)가 회맹(晦盲: 昏暗不明)하기만 하네.

유회(幽晦: 어둡고 어리석음, 음험한 자를 지칭)가 현혁(顯赫)한 자리에 올라 있고, 일월(日月: 군자를 지칭)은 아래에 숨어 있다네. 공정무사(公正無私: 공평한 사람)는 오히려 종횡(從橫: 방종한 사람)으로 일컬어지고, 지애공리(志愛公利: 공리를 애호하는 사람)는 중루소당(重樓疏堂: 사적으로 高樓巨室을 지은 사람)으로 여겨지고, 무사죄인(無私罪人: 사심 없이 남에게 죄를 물은 사람)은 경혁계병(憼革戒兵: 병혁을 준비해 남을 해치는 사람, ‘貳’는 ‘戒’의 誤)으로 여겨지고, 도덕순비(道德純備: 도덕을 완비한 사람)에게 참구장장(讒口將將: 참언의 공격이 허다함)하네.

인인(仁人)이 출약(絀約: 폐출)하니 오포(傲暴: 오만교횡한 자)가 천강(擅彊: 권력을 전횡함)하네. 천하가 유험(幽險)하니 세영(世英: 일세의 영웅)을 잃을까 두렵다네. 치룡(螭龍: 이무기와 용)이 언전(蝘蜓: 도마뱀)이 되고 치효(鴟梟: 올빼미)가 봉황(鳳凰)이 된다네. 비간(比干)이 견고(見刳: 해부를 당함)하고 공자가 구광(拘匡: 匡 땅에서 곤액을 치름)했다네. (제 26절 「부(賦)」, 제 6항.)

 

요즘의 말로 다시 옮기면 대충다음과 같이 되겠다.(말 그대로 대충일 뿐이다. 일찍 유명을 달리 한 한학자를 기리는 마음으로, 그리고 그의 번역을 음미하는 기분으로 옮겨 본다.)

 

세상이 바르지 못하니, 역정을 내볼까나. 천지가 자리를 바꾸고 시간이 거꾸로 돌아가고, 늘어선 별들은 돌이 되어 떨어지고, 새벽은 어둠침침하기만 하네.

음험한 이들이 권좌를 차지하고 기세등등한데, 뜻있는 사람들은 숨어 있기만 하네. 공평한 사람을 오히려 정신나갔다 하고, 모두를 위한 일을 사심으로 지목하고, 원칙을 지키려 한 사람을 두고 혼란을 조장한다 하며, 깨끗한 사람에게 넌들 깨끗하냐며 오물을 퍼붓네.

어진 사람들이 내침을 당하고 오만방자한 자들이 권력을 전횡하네. 세상이 어지럽고 험악하니 참된 지도자를 못 찾을까 걱정이네. 인재들이 둔재가 되고 하룻강아지들이 승냥이떼가 된다네. 이미 ‘비간(比干)’의 심장이 뽑혔고, ‘공자’가 못된 곳에서 곤욕을 치렀네.

 

옮기다 보니, 두 가지 생각이 먼저 인다. 하나는, 순자는 시인이 아니라 정치가라는 것. 즉 옛 사람들의 시는 오늘 우리가 생각하는 시와 근본적으로 다른 데가 있다는 것. 다른 하나는 그러다 보니, 내가 거의 본능적으로 어조를 고치고 있다는 것이다(더 나아가 내용까지도 슬그머니.) 그의 원래 목청을 담아서 그대로 옮긴다면 어떨까나? ……

세상을 꾸짖는 목소리가 이토록 우렁차니, 이 고대 지식인의 마음은 절망 쪽인가, 용약(勇躍) 쪽인가? 용약(庸弱)한 마음이 가 닿는 눈길에는 이런 표현도 보인다.

 

북해에서 다시 서쪽으로 가면 무장국(無腸國)이다. 무장국 사람들은 체구가 컸으나 뱃속에 창자가 없어서 음식을 먹으면 소화도 되지 않은 채 곧바로 배설되곤 했다. 후대의 소설가들은 그들이 배설한 그것을 어쩌면 다시 먹을 수도 있었으리라는 가정하에 무장국 사람들을 몇 등급으로 분류했다. 즉 등급이 낮은 사람들이 바로 윗 등급의 사람들이 배설한 것을 먹고 맨 나중 등급의 사람들이 배설한 것은 개가 먹는다는 추측이었다. (위앤커, 『중국신화전설 1』, 전인초·김선자 옮김, 민음사, 2002, 신장판[초판: 1984], 565쪽)

 

순자로 하여금 저리 포효하게 한 것은 그가 세상의 외양에 분노하면서도 속에서는 다른 움직임()이 있다는 것을, 혹은 있어야 한다는 것을, 있으리라는 것을 믿고 있었다는 증거가 아닐까? 저 자신은 그 갱도의 굴착자라고…… ?

그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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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는 오늘날의 상식에는 맞지 않는 말이다. 다만, 성형 유행에 대한 고대적 표현으로 간주할 수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