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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의 글

강남옥의 『그냥 가라 했다』

비평쟁이 괴리 2020. 11. 15. 22:48

옛 친구 강남옥 시인이 카카오톡으로 연락을 했다. 미국에서 살고 있다고 한다. 2 주 전 일이다. 마지막으로 본 건 40년 전이었던가? 그리고 오늘 그이의 새 시집, 그냥 가라 했다(산지니, 2020.11)를 받았다. 시집을 읽으면서 이국에서 모국어로 시를 쓰는 마음을 짠하게 느낀다. 이 땅에 사는 시인들이 자신이 한글로 시를 쓰고 있는 중이라는 걸 특별히 의식하던 시절은 한참 지났다(아마 김수영 세대가 마지막일 것이다.) 요컨대 오늘날의 한국 시인들에게 한국어 글자는 생존의 바로미터가 아니다. 그들이 그 언어를 특별히 생각하는 것은 생존 쪽이 아니라 생산 쪽이다. 즉 한글은 풍요한 상상세계를 이룩하는 데 쓰일 알곡들이다. 반면 외국 거주의 시인에게 모국어는 오늘의 모습을 근원에 연결해주는 절대적인 끈이다.

그게 외지에 사는 시인들로 하여금 모국어로 시를 쓸 수밖에 없게 하는 까닭이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그들이 쓴 시는 그들이 사는 땅에서 읽히지 않는다. 그 언어가 상용되는 세상에서도 그들의 시가 읽힐 확률은 그리 많지 않다. 모국과의 인연이 상당수 끊어졌는데, 그곳에는 그 언어를 쓰는 시인들이 차고 넘쳐나기 때문이다.

그냥 가라 했다에 그런 고립의 상태가 선명하게 자국을 남기고 있다면 그것은 강 시인의 연필심이 여전히 예리하게 깎여 있기 때문일 것이다.

 

당신이 등을 보이고 걸어간 길

사라진 날들

함께했던 시간의 무게만큼

당신 구두 굽 모양의 땅이

패인다

그 자리에 빗물 고이고

넘쳐나서 흐르다 편편해진다

그 자리에 꽃씨 떨어졌기를 소망했다면

모든 상처는 꽃이겠다

모든 꽃은 상처겠다 (「패인 자리」)

 

첫 시다. 내가 다른 자리에서도 언급한 바 있듯이, ‘서시는 대체로 시집의 상징도mise en abyme’로 기능하기 일쑤다. 이 시는 그런 기능을 거의 완벽하게 충족하고 있다. 이 시의 당신은 시인 자신을 가리키는 것으로 봐야 실감이 온다( ‘당신으로 지칭하는 데에는 묘한 무의식의 작동이 있다. 이는 별도로 분석할 일이다.) 화자의 눈에 비친 시인의 가장 두드러진 모습은 구두 굽이 그렇게 했다고 가정하는 패인 자리다. 이 표현은 당신이 이 땅을 떠난 것이 아니라, 이 땅의 어느 틈으로 웅크리고 숨어 들었다는 것을 가리킨다. 그것은 상처와 연관이 있다. 구두 굽이 땅을 판 것으로 보자면 상처를 준 이는 당신이어야 할 터인데(이 땅을 버리고 떠났으니까), 실제로 드러난 진술로 보자면 당신이 상처를 입었다(아마도 어떤 상처가 당신을 떠나게 했다). 상처는 기묘한 순환(주고 받기)의 궤도를 돈다. 그 궤도가 움푹 패인 곳에 빗물을 흐르게 하다가(빗물은 눈물이다) 넘치게 하고 최종적으로 꽃으로 도드라지게 한다. 이 시의 매력은, 그러니까, 음각과 양각의 확산적 교번(交番)이다. 마음의 밑바닥을 보자면, ‘떠날 수밖에 없었다떠남은 기쁨의 원인이다의 교번인데, 그보다는 파인 흙피어난 꽃의 감각적 대조의 반복이 강렬하다.

강 시인은 미국에서 어떻게 살고 있든 여전히 한국의 시인이다. 그건 어쩌면 숙명같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