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명교(정과리)의 문신공방
유예된 카타르시스의 시학 -박범신의 『흰 소가 끄는 수레』 본문
이 늪 속에 빠진 사유, 참말(眞言)과 깨달음을 구하고자 하는 저 희원은 한국문학에서 낯선 것은 아니다. 자기 동일성의 주변을 하염없이 맴도는 사유의 똬리는 특히 여성작가들에게서 두드러졌던 한국적 문체의 한 표본이며, 삶의 정화(精華) 혹은 일상으로부터의 해탈을 꿈꾸는 희원 또한 한국문학의 일상적 주제 중의 하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딘지 낯설다. 흰 소가 끄는 수레에는 무언가 전혀 새로운 것이 나타나 4년 만에 집필을 재개한 작가의 변모가 그 자체로서 한국문학의 변화를 자극하는 사건인 것 같은 놀라움을 준다.
그 ‘무언가’는 문체의 흐름, 사유의 운행을 휘몰아치는 속도로부터 비롯된다. 여기에서 수레를 끄는 흰 소의 느릿느릿한 움직임은 찾을 수 없다. 정반대로 ‘낭만적 격정’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는 정념의 회오리가 ‘흰 소’의 입간판을 우당탕탕 날리면서 텍스트를 숨가쁨의 극치로 끝없이 몰아넣고 있다. 그로 인하여 늪의 문체는 자맥질의 문체가 되고 참말의 기다림은 헛말들의 폭포로 바뀐다.
이 속도는 강도(强度)가 결코 아니다. 단순히 자아의 방황에 신열을 씌우고 방황의 동인이 된 죄의식을 더욱 채찍질하는 그런 강세형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완전히 질적인 새로움의 원천이다. 그것으로 인해 작가의 방황, 인간의 죄의식은 “타락한 방식으로 진정성을 찾아 헤매는 문제적 개인”의 상투적 모형을 벗어난다. ‘개인’은 결코 이 소설들의 주인공이 아니다. 소설의 주인은 거꾸로 정념 그 자체다. 그것은 개인의 내면에 살지 않고 바깥에서 무자비하게 증식하면서, 강도(强盜)처럼 주체에게로 쳐들어와 그의 자율 신경망을 난도질한다.
그렇게 해서 남는 것은 결코 멈추지 않을 정념의 회오리이다. 이 소설들에는 발단과 전개와 대단원이 없다. 여기에는 오직 클라이맥스만이 있다. 감정의 극단들의 연속만이 있다. 이것을 작가는 분명 대중소설로부터 가져왔다. 죽음보다 깊은 잠 이래 그에게 붙은 ‘대중소설가’라는 딱지는 작가에게 상처를 준 게 분명하지만, 그러나 상처는 마음을 쬘수록 딱지지기만 할 뿐이다. 풀잎처럼 눕다, 그리고 빼어난 문학적 성취를 거둔 불의 나라, 물의 나라는 두루 대중소설들이었다. 그리고 작가는 특히 후자의 작품들을 통해 대중소설이 어떻게 통속으로 빠지지 않고 삶의 건강성을 씩씩하게 환기시킬 수 있는가 하는 모범을 보여주었었다. 오늘의 소설에도 그 흔적은 여전히 남아 있다. 문학인으로서의 우월감, 주인공의 마음의 과장된 현시, 가족에 대한 미화, 비유들의 극단성(가미카제, 나비떼) 등은 대중소설의 성향과 기법이 그의 체질 속에 녹아 있음을 입증한다.
헐리우드 영화가 이원성의 대위법(들뢰즈)으로 이루어지듯이, 가장 천박한 대중소설은 클라이맥스와 대단원을 되풀이하는 것으로 독자를 성적 흥분의 상태로 휘몰고 간다. 흰 소…의 정서적 극단성은 바로 그것을 절묘하게 도입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이 소설의 근본 기법이 대중소설로부터 왔다고 했을 뿐이다. 이 소설은 결코 대중소설이 아니다. 오히려, 결정적인 단절, 마치 단호한 의지의 기합(氣合)과도 같은 통속과의 결별이 대중적인 것과의 입맞춤 속에, 만해의 입맞춤에서처럼, 날카롭게 표명되고 있다. 여기에는 절정은 있는데, 대단원이 없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소설은 결코 독자에게 사정(射精)을 허락하지 않는다. 오직 절정들만이 있음으로써, 카타르시스는, 정화(淨化)는 끝끝내 유예된다.
그렇게 소설은 독자를 고뇌의 절정 속에 정지시킨다. 어떤 아득한 침묵, 입이 새까맣게 타버리는 정지가 이 숨가쁜 속도의 파노라마 위에 반월처럼 걸린다. 그 저주같은 달은 소설의 안과 밖을 두루 되새기게끔, 다시 말해 반성케 한다. 독자는 주인공의 고뇌에 이입되지도, 통속소설의 독자처럼 흥분을 발산하지도 못하리라. 그럼에도 그 달과 더불어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너무 많을 것이다.
1997. 12. 16, 시사저널, 「숨가쁘게 몰아치는 정념의 회오리」(발표지면의 제목)
'문신공방 > 문신공방 하나'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기억의 윤리는 과거를 미래로 펼친다-최윤의 「워싱톤 광장」 (0) | 2022.10.22 |
---|---|
삶의 의미라는 괴물이 출몰하는 그곳-이창동의 『녹천에는 똥이 많다』 (0) | 2022.10.12 |
산문 읽기, 산문 들기 - 최인호의 「산문(山門)」 (1) | 2022.10.03 |
비평은 인식이 체험되는 공간 (0) | 2022.09.15 |
불을 머금은 투명한 물의 세계 -오정희의 『불꽃놀이』 (0) | 2022.08.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