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명교(정과리)의 문신공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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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림의 글/소설읽기

소설의 생존과 새로운 지성의 출현

비평쟁이 괴리 2021. 6. 22. 06:56

※ 아래 글은 동인문학상 제 52회 2021년 6월 독회의 심사의견으로 제출된 것이다. 조선일보 홈페이지에서도 읽을 수 있다. 신문사의 양해를 얻어 블로그에도 싣는다.

전반적인 인상

1. 소설의 생존이라는 문제

조금 과장해서 말한다면, 소설의 생존의 문제가 점점 더 심각하게 대두되고 있는 형세이다. ‘이야기문채의 결합으로 이루어져 인간사의 대용품들의 공장으로서 출현했던 소설은 19-20세기에 누렸던 거의 독점적인 지위를 잃고 매체와 유통 구조가 완전히 다른 새로운 이야기 제작체의 번성에 실종의 위기를 맞고 있는 형국이다. 이 신종으로 출현한 이야기 생산물들은 본래 소설이 누린 영향력을 좇으면서 그와 비슷한 방식으로 자신의 신체를 가다듬고 있는 중이라서 언제 이 소설이 저 소설이 될지 알 수 없다는 것도 곤란함을 더욱 악화시키고 있다.

이때 정말 필요한 것은 소설의 종말이라든가 문학의 소멸이라든가, 이런 말세론을 퍼뜨리는 것이 아니라(21세기 벽두에 이런 쓸모없는 군말들로 인해 에너지 낭비가 얼마나 심했나), 언어문화의 변화에 대한 진지하고도 심각한 토의이다. 그걸 혼자 할 수는 없다. 생각 있는 문학 종사자들이 모두 머리를 모으고 궁리를 해야만 한다. 그런데 연구와 평론의 제도적 분리라는 이 희한한 한국적 풍토 속에서 상당수의 능력 있는 문학 탐구자들이 19-20세기 문학의 공동묘지에 번잡하게 물을 실어 나르고 있고(그 물은 소생수인가? 적어도 사자들을 쇼생크 탈출시키기 위한, 한 모금 추김물인가?), 오늘의 문학을 다루는 잡지판에는 채 무르익지 못한 느낌과 주장들이 사유(思惟)의 이름을 걸고 시급 현안의 딱지를 붙인 네모 상자에 담겼다가 장난감 인형처럼 튀어나오고 있는가 하면, 여전히 작가들은 자신의 책을 한 부라도 더 팔아줄 출판사에 목을 대고 있다(지난 30년 간 그렇게 해서 잘 나가던 작가들은 지금 어떻게 되고 있나?)

소설은 분명 변해야 한다. 변하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문제는 어떻게 변하는가, 이다. 그 발생사에 대해 말이 많고도 많은 소설이, 그리고 모든 소설은 반-소설이다”(키베디-바르가)라는 명제에 걸맞게 끊임없이 변신을 거듭해 온 소설이 지난 2세기 동안에 가장 영향력 있는 문학 장르로 군림한 까닭이 단순히 상업성 때문은 아닐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 소설이라는 것의 존재 이유cause’에 대해 우리는 다시 가열차게’(옛날 운동권들의 상시적 부사어를 쓰자면) 피튀기는 논쟁을 해서 소설이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지, 아니면 폐업할 것인지, 다른 장르에 양도할 것인지에 대한 대답을 찾아야만 할 것이다. 그런데 저 옛날에 나리던눈은 어디 있는가?”(프랑수아 비용)

2. 새로운 지성의 출현

문학의 변화를 예감케 하는 또 다른 현상은 작가-정보해독자들의 출현이다. 원래 소설이 독자들의 사랑을 받아 온 중요한 원인 중의 하나는, 그것이 체험적 인문학의 일종이라는 데에 있었다. 지난 1세기 동안 한국의 소설도 그러한 지적 성찰을 실감할 수 있는 장소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해 왔다. 그런데 21세기 들어서 다른 존재들의 출현이 확연히 느껴진다. 즉 최인훈·이청준·이인성 같은 인문적 지성이 아니라 정확한 과학적 지식에 근거해서 사실의 의미를 해독하고 그 추이를 진단하는 정보적 지성이라 부를 수 있는 소설가들이 점점 더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는 것이다. 인문적 지성이 삶에 대한 종합적 지혜에 근거해 세상을 진단한다면, 이 정보적 지성은 귀납적이라고 부를 수 있는 방식으로, 구체적인 정보들에 면밀한 논리를 부여하며 세상에 대한 통찰을 생산해낸다. 지난 번에 후보작으로 올랐던 이현석의 경우도 그렇지만 이번엔 아쉽게도 오르진 못했으나 주목을 해야 마땅한 조광희의 인간의 법정(솔출판사) 역시 전문지식의 정확한 이해를 통해 인간사에 개입하며 상상의 문을 열고 있는 작품이다. 특히 그가 가진 과학적 지식이 단순히 수집의 차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과학의 원리를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오늘날에도 채집된 장보들에 판타지를 입혀서 공상과학소설을 만들곤 하는 풍토가 S/F를 내세운 소설이나 영화, 드라마에서 여전히 보여지는 현상이긴 하지만, 유의미한 과학소설의 길은 과학의 원리와 삶과의 유관성을 이해하는 바탕 위에 미래를 구상하는 데에서 제대로 열릴 것이다. 저 옛날 김호진의 인디케이터(국민서관, 1999), 이영의 신화의 끝(좋은 벗, 1999), ‘듀나태평양 횡단 특급(문학과지성사, 2002)을 통해 개시되었던 그 길이 이제 본격적으로 개척되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