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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경의 『우주보다 낯설고 먼』 본문

울림의 글/소설읽기

김연경의 『우주보다 낯설고 먼』

비평쟁이 괴리 2021. 5. 25. 03:56

※ 아래 글은 '동인문학상' 2021년 5월 독회에 심사의견으로 제출된 것이다. 조선일보 홈페이지에서도 읽을 수 있다. 신문사의 양해를 얻어 내 블로그에도 싣는다.

예전에 밑구녘이 찢어지게 가난하다는 말이 있었다. 한국인의 상당수가 그런 가난의 늪을 탈출하여 물질적인 안정을 누리고자 필사적으로 몸부림한 게 지난 세기 후반부이다. 필자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 1인당 국민소득이 100불을 겨우 넘었었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3만불을 웃도는 살림을 구가하고 있다.

무수한 사연이 그 과정 속에 쌓이고 쌓였으리라. 김연경의 자전소설 우주보다 낯설고 먼은 바로 이 한반도판 입지전의 가장 전형적인 양상을 생짜로 양각하고 있다. “우주보다 낯설고 멀게만 느껴지는, 그래봤자 겨우 40년 전인데도 불구하고, 그 시간대에서부터 오늘날까지, 한 가족이 산골을 탈출해 가게 사장님이 되고야 마는 그 주구장창(주야장천)’의 달음박질을 생중계함으로써.

그렇다 해도 이 소설은 자서전이 아니라 소설이다. 그렇다는 것은 여기에 증언의 활력과 뿌듯한 성취감이 있는 게 아니라, 살아온 삶에 대한 투명한 반성과 그에 근거한 각성이 있다는 것이다. 소설의 화자는, 처음의 의도가 무엇이었든, 이야기를 풀어나가면서 차츰 자긍심을 느끼기보다는 무언가 꺼림한 감정들의 복병들을 만나게 되고, 그것들을 정확하게 묘사하기 위해 꼼꼼히 붓질을 하는 작업을 통해, 독자를 한국적 돌파담에 대한 객관적 이해와 깨달음으로 자연스럽게 안내한다.

그 깨달음의 요목들을 나열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가난은 벗어나야 할 지옥이라고 말해지지만 실상 사는 기운의 원동력이라는 사실. 그들은 처음부터 가난했고 사정이 나아져도 가난했다. 삶에서의 모든 사건들은 가난으로 집중된다. 이런 진술처럼.

 

벌을 다 받으면 쏜살같이 밖으로 내뺐다. 형우는 슬슬 깨달아갔다. 모든 것이 이 방처럼 뭔가 어그러지고 찌그러졌다. 모두 가난 탓이라는 생각도 꿈틀거렸다.”(p.307)

 

한국인은 가난에서 벗어나고자 기를 쓰고 일했다기보다, 가난을 먹고 살았다. 그것은 그들이 가난했기 때문이 아니라 부()에 눈이 떴기 때문에 이 탈출극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풍요에 꽂힌 시선이 끊임없이 더 큰 풍요를 향해 달려가려면 계속 가난을 되새김해야 한다.

둘째, 이 가난과 풍요는 통상 원시와 문명으로 번역된다는 사실. 가난한 자는 미개한 자이고 부자는 문명인이다. 그래서 방향이 저절로 주어진다. 무조건 문명 쪽으로 가야 하는 것이다. “자존심이고 뭐고 간에, 곧 죽어도 다시 고제 골짜기로 들어가기는 싫”(p.60)은 것이다. 따라서 이들의 삶은 현재 주어진 환경에 노상 불평하면서도 그 환경의 정점에 놓인 삶의 상태를 전폭적으로 따른다. 요즘 예능프로에서 유행하는 말로, ‘무조건 긍정이 이들 삶의 바른 자세이다.

셋째.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들이 먼저 앞서 나간 사람들, 즉 먼저 부를 차지한 사람들의 꼬붕이 되거나, 똘마니가 된다는 것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다. 이제 그들은 앞서 나간 사람들을 따르면서 경쟁자로 변신한다. ? 목표는 그들에게 똑같으니까.

광속이 불변이듯이 꿈의 목표는 모두에게 똑같다.

 

그래, 너거 엄마가 처녀 때 얼마나 멋쟁이였는지 아나? 머리도 치렁치렁 늘어뜨리고 엉덩이에 딱 달라붙는 미니스커트 입고…… 지금은 저래 노점상이나 하고 있지만.”(139)

 

넷째. 그러니까 도찐개찐이다. 미리 부를 축적한 사람은 엄청 앞서 나간 것 같지만, 그 밑절미는 뒤쫓는 사람과 별로 다르지 않다. 다를 바 없다. 원시인과 문명인은 그렇게 뒤섞인다. 원시인과 문명인을 대비시키는 이 묘사를 보라.

 

“(1) 다음 날 오후가 되자 큰엄마가 왔다. 짧고 윤이 나는 단발 머리에 화장이 화려하지는 않되 어딘가 정돈된 얼굴, 무릎이 보이는 치마에 새카만 롱부츠를 신고 있었다. 엄마와 동갑임에도 완전히 딴 세상 사람이라는 건 금방 보였다. 부산에서 태어나 이화여대 나온 교수와 거창에서 태어나 초등학교만 간신히 졸업한 까막눈 아줌마. 이건 거의 사람과 동물의 차이라고 연수는 생각했다. 집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큰엄마의 눈에는 정은이만 보이는 것 같았다. (2) 다소 늦은 점심을 먹는 내내 정은이 옆에 붙어 앉아 밥을 떠먹이고, 명절이 아니면 구경할 수도 없는 조기의 살을 일일이 발라내 입안에 넣어주었다. 연수의 눈에는 무척 낯선 풍경이었다. 엄마가 없을 때는 친구들도 그냥 보낼 만큼 연수를 좋아하던 정은이도 아이다운 직설 화법으로 사촌을 내쫓았다. / “우리 엄마 왔으니까 언니 니 이제 그만 가라.”(pp.94-95)

 

(1)은 두 사람의 차이를 힘주어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천연덕스럽게 (2)로 넘어간다. 무심코 따라가던 독자는 (2)에 와서 무언가 걸리적거리는 듯한 느낌을 갖는다. 눈을 비비고 자세히 보자니, 대학교수인 큰 엄마나 농투성이 엄마나 자식만 챙기는 건 똑같다. 거의 짐승스럽다. 그리고 그 부모에 그 아이다.

 

이렇게 문명은 원시를 노출하고 원시는 문명이 될 자격을 얻는다. 원시와 문명은 그렇게 뱅뱅 돈다. 그리고 결국은?

 

마지막으로, 그러니까 아무리 문명인으로 거듭난다 할지라도, 겨우 오십보 더 나아갔을 뿐이다. 주인공 연수의 대학교 합격 여부를 미리 알고자 엄마 유숙이 이곳저곳으로 점치러 다닌다. 복채만 탐내는 점쟁이들에게 화를 내다가 마침내 진짜 점장이를 만난다. 그가 진짜인 것은 다음 점괘풀이가 그대로 증명한다.

 

자네, 늦복이 보통이 아니구먼. 늘그막에는 아들딸이 주는 돈 갖고 떵떵거리며 살겠어.”(p.304)

 

소설은 곧바로 마감함으로써 연수가 정말 합격했는지 여부는 알려주지 않는다. 하지만 독자는 빤히 안다. 연수가 당연히 합격하리라는 것을. 그의 장래가 활짝 열리리라는 것을. 그러나 그렇다고 정말 유숙떵떵거리며 살게 될까?

이 또한 아니라는 것을 독자는 안다. 소설 속 연수의 실물인 작가 김연경은 국립대학에서 박사학위까지 딴 지식인이지만 가난한 소설쟁이에 지나지 않는다.

요컨대. 진짜 버는 놈은 따로 있다는 것. 저 희한한 무조건 긍정’ ‘무조건 따라하기의 돌고 도는 강강수월래 속에 재벌의 열쇠는 들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면 생각해보자. 연수네 가족은 소망을 성취했는가? 못했는가? 그들이 자신들의 소망이 무엇이었는지 알기나 했을까? 한국인들은 무얼 바라고 여기까지 왔는가? 어쨌든 300배 이상의 물질적 번영을 이루긴 했다. 이보다 더 빠를 수는 없다고 여겨질 속도로. 그런데 그것이 뜻하는 바가 무엇일까? 우리는 정말 문명인이 되었을까? 부와 그것은 일치하는가? 그렇다 하자. 부와 교양은 일치하는가? 이런 걸 무작정 따르는 것도 문제지만 그걸 무작정 부인하는 것도 우스꽝스런 일이다. 지금 자신을 돌아보라. 그걸 분명 느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를 초고속으로 발전시킨 이 방법론이 빠뜨린 게 있으니, ‘자기성찰이 그것이다. 그동안 그걸 유보했다 하더라도, 이젠 할 때다. 그것을 빠뜨린 채로 우리는 스스로를 우주보다 낯설고 먼존재로 만들고 있다. 소설 제목의 뜻도 긴 내력을 품고 유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