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명교(정과리)의 문신공방

정지아의 『자본주의의 적』 본문

울림의 글/소설읽기

정지아의 『자본주의의 적』

비평쟁이 괴리 2021. 6. 29. 09:26

※ 아래 글은 동인문학상 제 52회 2021년 6월 독회의 심사의견으로 제출된 것이다. 조선일보 홈페이지에서도 읽을 수 있다. 신문사의 양해를 얻어 블로그에도 싣는다.

자신이 빨치산의 딸임을 밝히는 것으로 문학판에 등장한 정지아의 소설에 특별한 것이 무엇일까? 그것은 자본주의의 최종적 승리 이후의 세계에 대한 종합적 상황 판단으로 보인다. 그 상황 판단은 작가 스스로 자신의 신세를 자본주의의 정신적 포로이자 무기형 수인으로서 규정(?)함으로써 도출되는 것으로서, 그 판단에 의하면, 자본주의의 승리는 완벽해서, 누구도 그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아니 벗어난다는 말은 화자를 비롯 그와 정서적으로 연결된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가능한 단어인데, 왜냐하면 자본주의의 요란한 비판자들까지도 실은 아주 적극적으로 이 세계의 원리를 낼름 삼킴으로써 무늬만 빼고 속은 모두 푸른색이 되었으니, 이 세상은 누가 시킬 것도 없이 모두가 자발적으로 푸른 광장에 모여, 이득과 출세의 경연을 향해 달려나가고 있는 참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벗어난다는 말은 오로지 화자와 그 동류들의 머리에만 거주하는 것이자, 동시에 이제 쓸 까닭이 없는 죽은 말이 되었으니, 왜냐하면 화자들조차도 거기에서 벗어날 꿈을 결코 꾸지 못할 지경으로 자신의 존재가 늘 불 켜진 대로에서처럼 훤하게 발각되어 있는 상태이니까 말이다. 그들은 제발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고 싶어하는 데도 불구하고 존재할 수밖에 없는 것이고, 그에 대한 어떤 하소연이나 불평도 곧바로 재화를 발생시킬 요인으로 써먹히는 것이니 가만히 침묵하는 게 최선인 듯한데, 그러나 침묵조차도 할 수 없는 기막힌 처지이다. 왜냐하면 평생을 유폐당한 사람이라도 이 세상에서는 최소한 하루에 두 번은 점호를 받기 때문이다.

이런 판단은 영원한 수인의 처지를 절감한 사람만이 내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이 상황이야말로 소설이 쓰여져야 할 이유와 그 방법을 명백하게 제공해주는 것이니, 왜냐하면 어쨌든 존재가 발각될 수밖에 없는 처지라면 그런 상황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것밖에는 달리 길이 없는데, 그를 가둔 채로 존재증명을 요구하는 세계가 그 폭로의 행동을 보장할 수밖에 없으니, 이야말로 소설쓰기의 절호의 기회가 아닐 수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 소설의 효과는, 열린 사회와 그 적들이 서로 적대하면서 한통속으로 어우러져 신나는 한 세상을 꾸려가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니, 적을 자처한 자들은 이 소설을 거울 삼아 자기 모습을 들여다본다면 썩 유익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