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명교(정과리)의 문신공방

구병모의 『바늘과 가죽의 시』 본문

울림의 글/소설읽기

구병모의 『바늘과 가죽의 시』

비평쟁이 괴리 2021. 6. 22. 06:59

※ 아래 글은 동인문학상 제 52회 2021년 6월 독회의 심사의견으로 제출된 것이다. 조선일보 홈페이지에서도 읽을 수 있다. 신문사의 양해를 얻어 블로그에도 싣는다.

우리 집에는 머리가 희끗희끗한 나이에 아직도 고3수험생처럼 사느냐고 핀잔을 맞곤 하는 사람이 있다. 워낙 바탕에 갖춘 게 없어서, 열심히라도 하지 않으면 뭔가 늘 부족한 듯한 느낌에 사로잡혀 불안해지니 쉼없이 몸을 놀려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무언가 끊임없이 만들어내긴 하는데, 그 중 대부분은 쓸모가 없어서 방치되어 있다가 시간이 지나면 슬그머니 버려진다. 그가 그렇게 사는 건, 그렇게 살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렇게 살 수밖에 없기 때문.

뜬금없이 사생활의 못생긴 조각을 들추어낸 건, 구병모의 소설을 읽다가 뭔가 유사한 점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요컨대 방금 폭로된 이야기에서 부정적인 것만 빼 놓으면, 구병모식 글쓰기에 흡사하며, 그것이 그 자체로서 하나의 형태적 특성을 이룬다고 할 수 있다.

구병모의 소설에는 대용량의 에너지들이 투여된 흔적이 역력히다. 그는 모든 세목에서 최대한의 공을 들인다. 착상, 수사, 묘사들 하나하나가 세밀히 기술된다. 문제는 작가의 몰입이 과해서 이 세목들 사이에 경중이 적절히 부여되지 않는다는 점. 그러다 보니, 이야기가 일관된 흐름을 유지하기보다는, 각 부분들의 힘이 무척 세서, 작품 곳곳에서 이리 불퉁 저리 불퉁 융기하면서, 다종의 삽화들을 잇고 엮은 언어 블록이 된다. 그렇게 해서, 인간의 몸으로 깃들어 제화업자가 된 어떤 정령의 이야기가, 경제, 계급, 사랑, 해후, 제화공정, 출산, 취미생활, 존재, 시간, 노화, 불멸, 필멸과 신생 등의 인간사의 모든 주제들로 번식해 나가고, 이 이 각각의 분야에서 쓰이는 특별한 용어들을 동반하면서, 별의별 이야기거리들이 사방에서 열천의 기포들처럼 떠올라 저만의 색깔을 가진 증기들을 토해내다가 꺼진다.

20세기 후반기에 이런 미학적 시도에 대해 바로크Baroque’라는 명명이 있었다. ‘전체의 조화를 위한 부분들의 긴밀한 협력을 핵심원리로 갖는 고전주의classicisme’의 울타리 바로 바깥에서 부분들의 자율성과 생성성을 보여주면서 우아의 화단 옆에서 기화요초들을 번식시키며, 당시의 지배 사조였던 고전주의를 폭파할 것 같은 기세로 등등히 확산하던 미적 경향이었다. 문학 쪽에서 바로크 운동의 윤곽을 그렸던 장 루세Jean Rousset는 훗날 그 운동이 고전주의를 다른 각도에서 본 것에 불과했다고 스스로의 업적을 부인했지만, 이 미학적 아이디어 자체는 20세기 후반기의 모험적 예술가들과 예술이론가들에게 새로운 예술을 위한 영감의 원천이 되었다.

요컨대 부분들의 자율성은 곧바로 개체(개인)들의 자유와 해방의 징후이자 실행으로 받아들여졌고, 이 자율성은 곧바로 생성의 활력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더 나아가 그런 운동에 꽂힌 눈이 내다 본 원경 앞에는 오늘의 닫힌 전체를 부수고 양과 질에 있어서 모두 격상된 열린 전체의 세계가 꿈틀거리며 잉태되고 있었다. 문제는 바로 열린 전체라는 개념 그 자체. 그것은 그냥 달성되는 것이 아니라, 부분들의 자율성에 정밀한 통제를 가해야만, 다시 말해, 자율화를 더욱 북돋는 방식으로 제동을 걸어야 시작될 수 있는 것이라서, 그것 자체가 매우 복잡한 공정을 요한다는 것이니, 바로크 앞에 바로크 절차들이라는 난해하기 짝이 없는 숙제가 바로크풍으로 거듭 발생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200쪽 가량의 이 소설에 핵심 주제는 4분의 3쯤 지나서 제시된다. 이 소설은 가죽과 가죽을 바늘과 실로 잇는 행위라는 것. 그 행위는 있는 그대로 아름다움의 존재로서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무심함과 무지로 인해 더욱 빛나던 아름다움을 기억한다고. 가죽과 가죽을 바늘과 실로 잇는 행위는, 우리에게 있어서 숨 쉬는 것이나 물을 마시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고. 무두질이 잘되어 싱그러운 냄새를 풍기는 가죽에 바늘을 대는 순간, 바늘은 저절로 노래를 불렀다. 노동은 영원한 이명과도 같이 그들에게 달라붙은 것이어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듯 일하는 것이 존재의 몫이었다. 목소리만이 아닌 온몸의 노래. 구두에 새겨진 한 땀의 스티치마다 하나의 음계였고, 한 켤레의 구두는 왼쪽과 오른쪽이 만나는 화음이었다.”(pp.145-146)

 

이런 미학적 실행이 그대로 영원을 표백하고 증거할 것인가? 아니면 필멸이 예정된 인간들을 쬐는 햇빛의 기능을 할 것인가? 왜냐하면 그 필멸인 것들은, “사라질 거니까, 닳아 없어지고 죽어가는 것”(149)이라서 애틋한 것만이 아니라, 바로 그 자체로 신생을 느끼게 해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야말로 불멸의 존재들이 결코 갖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니 무의미한 삶을 덧없이 사는 존재들과 몸을 바꾸는 것은 좋은 것인가? 아닐 것인가? 아이작 아시모프의 바이센테니얼맨이래 끊임없이 되풀이되어 온 이 물음을 가죽들을 잇는 바늘의 문체로 다시 되새겨 보는 것은 썩 감미롭다.

어쨌거나 이런 핵심 주제는 한데 지금까지의 긴 우여곡절의 필연적 도달점으로 주어지는 것인가? 아닌가? 독자들이 판단할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