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명교(정과리)의 문신공방

박솔뫼의 『우리의 사람들』 본문

울림의 글/소설읽기

박솔뫼의 『우리의 사람들』

비평쟁이 괴리 2021. 4. 26. 11:28

※ 아래 글은 '동인문학상' 2021년 4월 독회의 심사의견으로 제출된 것이다. 조선일보 홈페이지에서도 읽을 수 있다. 신문사의 양해를 얻어 블로그에 올린다.

프랑스의 문학연구자인 뤼시 앙게방(Lucie Angheben)은 한국의 젊은 소설가들의 연구로 2019년 프랑스의 엑스-마르세이유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학위 논문 제목은 1980-1990년 태생의 한국의 젊은 작가들 고독과 침묵을 번역하기: 정용준, 한유주, 최진영, 윤고은, 박솔뫼의 작품들에 대하여 (Les « jeunes auteurs » coréens nés dans les années 1980-1990 : traduire la solitude et le silence - Sur les oeuvres de Jeong Yong-jun, Han Yu-joo, Choi Jin-yeong, Yoon Go-eun et Park Sol-moe,)(Aix-en-Provence: Université d'Aix-Marseille, 2019)이다. 김혜순 시집, 한 잔의 붉은 거울 Un verre de miroir rouge(DeCrescenzo Éditeurs, 이춘우와 공역, 2016)의 번역자이기도 한 그녀는 2000년대부터 한국문단에 등장한 젊은 소설가들에 크게 공감하여, 이들의 문학이 당대의 한국사회에 대한 특유의 반응으로서, 화려한 경제적 풍요의 뒤에 감추어진 엔포세대이자 ‘88만원 세대인 젊은이들의 소외와 고독을 표현하고 있다고 보았다.

이 연구서에서 박솔뫼에 대한 연구자의 분석은, 무엇보다도 증언할 수 없음에 대한 침묵과 방황의 서사로 초점이 맞추어진다. 즉 풍요와 번성의 스펙타클 뒤에 숨겨져 있는 광주 항쟁의 비극, 여성들의 소외, 개인들의 부박한 위치 등등 한국사회의 이면에 도사린 어둠에 대해서 당대의 언어체계로서 표현할 수 없음에 절망하여, 바깥을 떠도는 자의 자발적 단절과 소통의 거부를 생활의 세목들을 통해서 암시적으로 드러내고 있다고 보았다. 이 일상 언어로 통역되지 못하는 몸의 표현들이 박솔뫼 소설의 대종을 이룬다는 것이다.

앙게방 분석의 연장선상에 보자면, 박솔뫼의 새 소설집 우리의 사람들은 그의 독특한 세계를 더욱 확대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아니 변화가 있는데, 그것은 일상적 삶으로부터의 단절을 넘어서, 소통을 이루는 특별한 방법을 고안하는 데까지 발전하였다는 것으로, 그 방법은 이미 죽은 열 두 명의 여자들이 그들을 죽인 살인마를 죽이는 양상에서 보이듯, 일상 사회의 폭력이 남긴 흔적과 기억, 버림받은 존재들 등 남은 데이타를 통해서 정보를 전달하는 방식이며, 그 방식의 드러난 결과는 폭로와 복수이다.

이런 새로운 소통의 방식은 일단 작동이 일어나자 본래 암시로서 기능했던 것들을 매개물로 삼아 다발적이고도 연속적으로, 일상적 언어체계를 압도하면서 풍자와 도발을 야기하기도 하고, 다른 세계에 대한 판타지를 창출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런 몸과 잡동사니들의 표현은 행동이나 사건으로서만 드러나지 의미로서 개입하지 않는다는 문제가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이 궁금증은 이런 방식의 글쓰기가 방금 말한, 풍자와 복수와 판타지는 가능케 하지만 세계관들의 대결 앞에서는 종종거리게끔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의문으로 이어진다. 가령, 다음과 같은 묘사를 보자.

 

“텐트 연극이 뭐냐고 묻는다면 매번 알 수 없고 정말로 알 수가 없다는 생각을 한다. 그게 뭐였을까, 텐트가 뭐였을까. 그러다 철거할 때에 아주 잠깐 텐트가 어떤 모양이었는지, 아 이런 형태였지 하고 눈에 들어온다.”

 

텐트 연극이라는 새로운 예술을 시도하는 사람이 꺼내는 이 발상의 막연함은 지속적으로 이어지면서 작품의 막바지까지도 한결같이 되풀이 된다.

 

실제 동물학자가 어떻게 말했는지에 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였고 모두 자신들의 가설을 이어나갔다. 그리고 새해가 가까워졌을 때 잠이 들었던 사람들도 하나둘 눈을 뜨고 테이블로 와 시계를 바라보았다. 이미 실수로 따버린 샴페인을 컵에 따르고 두근거리며 핸드폰과 시계를 번갈아 보다 새해가 되자 모두 웃으며 기뻐했다.

 

동물학자의 대답의 진실에 대해서 가능성은 무한인데, 동시에 그 무한은 무의미의 안개로 뿌옇다. 독자는 저 가능성의 무한으로서 독서의 즐거움을 맞이하겠지만, 동시에 가능성의 실현(가능)성에 대해서는 어떤 단서를 얻을지 알 수가 없다. 어쩌면 이는 작가의 정직한 상황 인식을 가리키는 것인지도 모른다(하긴, 우리가 겨울잠을 자면서 무슨 꿈을 꾸게 될 지 어찌 알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기왕 소통을 시작했다면, 이 개입 속에 무언가 진실을 전달해야 하지 않을까? 비록 철거당하는 순간에 행해진다 할지라도 그것이 무엇을 건설하려고 하는 것인지, ‘텐트 연극에 대한 최소한의 이해 가능한 구상을, 또는 그 최소한의 구상에 대한 최소한의 단서라도, “아 이런 형태였지라고 가정하는 대신에, 제출하고, “모두 자신들의 가설을 이어나갔다라고 쓰는 대신, 그 가설들의 초안을 보여주어야 하지 않을까? 그것이 새해의 기쁨을 맞이하기 전에 먼저 해야 할 일이 아닐까?

뤼시 앙게방이 예리하게 그 윤곽을 떴듯이, 박솔뫼는 언어의 다른 방식의 표현과 소통을 개발하는데 뛰어난 재능을 보여준 작가이다. 그에게 거는 기대가 큰 만큼 궁금증도 깊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