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명교(정과리)의 문신공방

비평은 인식이 체험되는 공간 본문

문신공방/문신공방 하나

비평은 인식이 체험되는 공간

비평쟁이 괴리 2022. 9. 15. 12:57

 

비평은 창작의 지도자도, 하인도 아니다. 비평은 창작의 언어에 기대어 말하는 또 하나의 언어이다. 무슨 언어? 그 언어는 체험으로서의 논리의 언어이다.

창작의 언어는 삶에 관계하는 언어이다. 그것은 언어를 삶 그 자체처럼 드러낸다. 문학에 생생함, 구체성, 리얼리티가 요구되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러나 처럼이라는 토씨에 주목해 주기 바란다. 문학작품은 현실의 삶을 그대로 드러내지 않는다. 그것은 현실을 다시 살지만, 다시 삶은 현실과는 다른 방식으로 사는 다시 삶이다. 문학이 허구인 것은 그 때문이며, 작가는 그 허구의 삶을 통해서 현실의 삶의 부정성을 폭로하고, 보다 나은 새로운 삶에 대한 자신의 열망을 드러낸다. 그 현실에 대한 이해판단과 새로운 삶에 대한 열망의 복합체를 우리는 세계관이라고 부른다.

창작에서 그 세계관은 체험의 형태로 녹아 있다. 그에 비해 비평은 그것을 인식의 형태로 재구성한다. 비평은 체험의 복잡함과 모호함을 명료한 개념들로 간추리고 일관된 체계로 잇는다. 그러나 비평은 논문도 문학사도 교리도 아니다. 그것은 창작의 자료들의 모음 이상이며, 비평가와 무관한 타인의 체험을 정리하는 것 이상이며, 비평가의 세계관에 의해 창작품을 평가하는 것 이상이다.

좋은 비평은 문학작품의 세계관을 잘라 말하고 그것의 시비를 가리기보다는 그 세계관이 구성되기까지의 과정을 좇는다. 왜 과정이냐 하면, 좋은 비평은 창작품이 엮어내는 삶의 과정에 동참하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그럼으로써 비평은 자신의 삶과 창작품의 삶을 서로 비교하고 함께 이해하며 동시에 변모시키고 싶어한다.

비평은 타인의 체험을 논리화함으로써 자신의 무의식을 의식화하며, 그럼으로써 서로 다른 두 개의 삶이 자유롭고 평등한 관계로 새롭게 태어날 수 있는 자리와 방법을 찾는다. 그 타인의 체험에 대한 인식을 비평가는 체험의 양식으로 행한다. 그는 인식을 살아야하기 때문이다. 그때, 비평은 삶을 분명해진 가시의 의미’(김수영)로 마주치게 된다.

비평이 읽히기 힘든 것은 그 때문이다. 그것은 삶의 고뇌의 의미, 즉 정신의 고뇌가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는 자리이다. 그것은 그 고뇌에 직면할 것을 호소한다. 편안히 살고 싶어하는 우리의 욕망 속에 난입하여 불편하게 살을 재촉한다. 그러나 비평가란 곧 독자이며, 독자는 곧 한 시대의 문화가 솟아나는 원천이 아닌가, 평론집이 거듭 생산되어야 하는 이유는 거기에 있다.

평론집은 씌어진 읽기, 즉 다양한 성층의 독자들의 무의식 책읽기가 의식의 형태로 제기되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평화신문19886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