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명교(정과리)의 문신공방
산문 읽기, 산문 들기 - 최인호의 「산문(山門)」 본문
모든 문은 다른 세상으로 통한다. 그리고 모든 지리적 경계는 언어의 경계이다. 문을 건너는 것은 곧 의미의 문턱을 넘어서 가는 것이다. 「산문」은 그 문의 본질에 육박한 소설이다. 그것이 단순히 구도의 소설이기 때문만이 아니다. 무엇보다도 ‘산문(散文)’을 거쳐 ‘산문(山門)’으로 들어가기 때문이다. 산문이란 지리멸렬한 것인데(‘이 산문적인 세상’하고 푸념하는 소리를 들어보라), 그런데 산문이란 비의가 열리는 통로인 것이다. 그러니, 이 소설, 「산문」의 산문은 상징적 기호로 충만해 있다. 그침 없이 내리는 비가 이 작품의 단순한 배경이 아니고 깊은 무늬이듯이, 지네와 제비와 반디와 버섯과 승검초 등의 동식물들은 사건의 양념이 아니고, 주지 무이와 공양주 할멈과 부목 김씨도 두루 주인공 ‘법운’과 여인의 보조역들이 아니다. 법운과 여인을 포함해 그들은 모두 그런 들쭉날쭉한 ‘인물’들이 아니라, 의미의 영역을 공평히 나누어 갖고 있는 상징 기호들이다.
그 이야기가 직접 보여주듯이 법운이란 법명 자체가 번뇌 다스림을 암시한다면, 주지 무이 스님은 법운의 근원을 암시한다. 무이(無二)란 곧 번뇌와 깨침이 둘이 아니라 하나임을 가리키고 있으니 말이다. 그런가 하면, “6․25 전쟁통에 손 하나를 잃고 있고, 허벅지에는 총탄을 맞아 관통상의 흔적이 남아 있는 상이 군인”이며 절의 온갖 “살림을 도맡아 하고 있”는 부목 김씨는 저 무이 스님의 이편 대척에서 이미 깨침과 번뇌가 하나로 뭉친 몸, 육화한 번뇌로 우뚝 서 있다. “머리만 깎았다면 절 살림을 도맡아 하는 원주 스님이라고 해서 법운은 가끔 농삼아 부목 김씨를 원주 스님이라고 부르곤 했”다는 것은 김씨가 주지 스님과 상징적 동위소를 이루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무이 스님이 말씀이자 뜻이라면, 김씨는 살아 있는 말씀, 살된 뜻이다.
하지만, 무이 스님도 부목 김씨도 산문은 아니다. 그들은 문의 저편 혹은 이편에 한껏 치우쳐 있다. 그들의 뜻과 몸은 이미 이루어져 있는 것이다. 그들은 문밖이거나 문안이지만 문은 아닌 것이다. 문이란 과정이고 생산(노동)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법운과 여인의 사건으로부터 어느만치 떨어져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무이 스님은 여행 중이고, 부목 김씨는 머리를 깎지 않았으며, 폭우는 산문에 빨리 이르게 할, 김씨가 자동차가 드나들 수 있도록 애써 닦아 놓은 다리를 끊어 놓았다. 법운과 여인의 안식은 그렇게 쉽게 얻어질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들이 치러야 할 업은 그들 스스로의 몫으로 고스란히 남아 있는 것이다.
산문의 의미론적 가치를 체현하는 것은 그들이 아니라 공양주 할멈이다. “영원히 웃고 있는 탈바가지를 뒤집어쓰고 덧뵈기 탈놀이를 하고 있는 남사당패 같아 보”이는 그녀야말로 법운을 산문으로 당기는 숨은 힘이다. “찬밥에 물을 말아 부뚜막에 앉아서 손가락으로 소금에 절인 오이지를 찢어서 먹는” “반토막의 새우”같은 몸인데, “법운이 온 뒤로 부쩍 공양에 뜸을 들”여 누룽지며 호박전, 콩국수를 만들어 먹이고, “하회탈같은 얼굴로 하얗게 웃”으면서 법운의 목욕 광경을 “한참을 쳐다보면서”, 법운이 민망해서 쫓는 데도 법운의 흰 속살을 칭송하는 할멈은 무이 스님과 부목 김씨와 정반대로 생산적 징표들로 가득 찬 기호이다. 그녀에 대한 이야기 다음에 곧 “발정기를 맞은” “장대한 반딧불들의 군무”가 나오고, 그리고 그 무렵에 “법운이 제비집에 꼼짝없이 들어앉아서 알을 품고 있는 어미새에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은 그러한 징후의 연속성 위에서는 아주 자연스러운 것이다. 단순히 나열되기만 하는 듯이 보이는 그 삽화들이 실은 그렇게 정교하게 짜여져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이도 법운과 여인을 대신하지는 않는다. 다만 그 둘이 함께 통과해야 할 문을 아득히 가리킬 뿐이다. 그 사정을 암시하는 암유적 단위가 비구니가 된 딸을 두고 있다는 것, 그리고 반귀머거리라는 것이다. 비구니가 아니라는 것이 아니라 비구니가 된 딸을 두고 있다는 것은 그녀의 행동적 지평이 실천의 차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영향의 차원에 있다는 것을 뜻하며, 그녀가 반귀머거리라는 것은 그녀가 뜻을 전할 수는 있으나, 상대방의 뜻을 들어 줄 몫은 맡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법운․여인의 소망을 대신해서 살 일은 없는 것이다.
그러니, 법운과 여인에게 후반부의 사건이 집중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암시된 의미의 문턱을 그들이 제 몸으로 건너야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몸의 실행이 전반부에 암시된 뜻의 육체적 전개에 불과하다면 그들이 그것을 겪는다는 게 무슨 소용에 닿을 것인가. 선험적 관념의 되풀이는 언제 어디서고 누구나 하는 것이니 말이다. 실은, 그 몸의 겪음 속에서 암시된 뜻 자체가 근본적인 변화를 얻게 되니, ‘산문’의 참 모습이 거기에 있다 할 수 있다. 폭우를 뚫고 법운과 여인이 벌이는 천도제의 전 과정은 번뇌와 깨침이 그냥 무이(하나)인 것도, 뜻모를 탈(할멈)인 것도 아니라, 번뇌의 철저한 되살기를, 아니 좀더 정확히 말하면 바꿔 살기를 겪고 나서야만 깨침이 얻어질 수 있다는 것을 그 자체의 모습으로 구현해 보여주고 있다. 법운의 버림받았던 과거에 대한 저주는 여인의 애버림에 대한 회오를 처음부터 끝까지 되살림으로써만 비로소 해원된다. 불상에 불을 지르고 달아났었던 법운은 이제 여인이 “이미 흘릴 눈물은 모두 흘려 버려 더 이상 나올 눈물마저 다 말라붙어 버렸”을 때, 창의(唱衣), 즉 불의 정화를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바로 거기에서 「산문」의 전 길이를 수놓고 있는 물의 천변만화가 그 속뜻을 펼쳐 드러낸다. 크게 나누어, 는적는적한 습기로부터 장마비로 그리고 떠도는 운무(안개와 이슬)로 바뀌는 그 수분의 변신 과정 끝에 법운은 송이버섯을 따고 승검초를 “꽃삽으로”(정화한 불의 이미지) 캐낸 ‘약 캐는 나그네’가 마침내 되는 것이다. 아름다운 독버섯이 암시하듯이 불은 그냥 타면 단지 유독한 연기와 저주의 단말마만을 남기지만, 온갖 물의 삶을 겪어 썩고 썩어서 풍화되면 그것은 약을 남긴다. 달리 말해, 습기를 한껏 머금은 불만이 “향기로운 방향”으로 퍼질 수 있다. 그러니, 불과 물이 무이이지만 그러나 실은 한없이 달라 상극할 때 비로소 그렇게 하나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산문(散文)이 산문(山門)으로 드는 길이 되는 내력도 여기에 있다. 깊은 산중의 흔한 이야기 하나가, 그 이야기의 온갖 물상을 상징적 기호로, 다시 말해 가장 비천한 것으로써 가장 드높은 것을 암유하는 매질로 치환시키는 사람의 손/눈 안에 넘쳐 흘러 문득 속세의 사건도 아니고 부동의 상징도 아닌, 제 몸을 통해 제 뜻 자체를 변모시키는 세속의 아주 희귀한 알음알이로 변신하는 것이다.
- 1994, 최인호, 『문학상 수상 작품집』, 훈민정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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