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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탈과 우회의 문체-서정인의 「광상」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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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탈과 우회의 문체-서정인의 「광상」

비평쟁이 괴리 2022. 7. 11. 11:26

서정인의 문체 실험은 주목을 요하는 소설사적 사건이다. 그의 문체 실험은 철쭉제에서 시작되어 달궁에서 본격화되었고, 요즈음 발표되고 있는 일련의 작품들에서 지속적으로 추구되고 있다. 그 문체, 아니 차라리 서정인적 문체학의 주 장치는 대화체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드러나지만 보통 지문에서도 폭넓게 작동하고 있는 특이한 이음법이다. ‘말꼬리 잇기라고 이름붙일 수 있을 법한 그 특이한 이음법은, 한 사실 혹은 단언을 제시하고는 그것을 뒤집는 사실 혹은 단언을 뒤잇게 하는 기본 형식을 연속적인 사슬로 구성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그때 이 단언들의 사슬은 간단히 서로 다른 두 견해의 대립의 개진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아마 그랬더라면, 그의 소설은 계몽주의 시대에 유행한 일종의 철학 꽁트의 형태를 취했을 것이다. 그의 단언들은 그렇게 되지 않고, 때로는 앞의 의견에 대한 정면 반박으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때로는 앞 단언의 한 일부에 대한 비틀기가 되기도 하며, 가지치기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 말잇기가 담론 단위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문장 단위로 이루어진다는 것도 같은 맥락에 놓이는 이야기이다. 언어학적 관점에서는 문장은 최후의 언어 집합체이지만, 서술학의 관점에서는 문장은 최초의 요소일 뿐이며, 따라서 언제나 불확정성의 상태에 놓여 있는, 무한히 다양한 이야기 나무들을 자라게 할 수 있는 조그만 씨앗이다. 그 최초의 씨앗 자체가 지속적으로 배반되고 비틀리고 가지를 쳐서 엉뚱한 또 다른 씨앗으로 변형되어 버린다. 그러니, 이야기는 오리무중으로 빠져들고, 피상적인 독서는 그 말꼬리 잇기를 일종의 장난 혹은 요설로 이해하기가 쉽다. 그러나 실제로 그 말꼬리 잇기는 어떤 일관된 하나의 주제에 의해 섬세하게 맥락을 이루어 이야기의 한 단락을 직조해내면서, 다른 단락과 은유적이거나 환유적인 연관을 맺어서 더 큰 주제의 맥락을 이룬다. 그렇다면, 비교적 일관된 주제를 모호하게 휘저어버리는 말꼬리 잇기의 효과란 도대체 무엇이겠는가? 그것이 직접적으로 겨냥하고 있는 것은 한 가지 편협한 것에 매여서 모든 것을 그것에 의해 해석하고 재단하는 인간의 미망이며, 그 한국적 양상으로서의 중심 신화이다. 말꼬리 잇기는 범주들의 변이를 통해 우리의 삶 구석구석에 얼마나 그 중심 신화가 깊이 침투해 있는가를 보여주는 한편으로 항목들의 다양성을 제시해 중심(이라고 착각되는 것) 외에 얼마나 다른 삶의 양태들이 풍요롭게 살아 있는가를 보여준다. 그것은 중심을 비틀어 주변으로 일탈하고 주변들의 우회를 거쳐 다시 중심을 공격하는 양상으로 드러나면서, 사실상 주변이란 존재하지 않으며(당연히 중심도), 모든 서로 이질적인 것들의 상호 관련 속에 삶이 놓여 있다는 것을 환기시키고 있다. 모든 것들은 서로 다르게, 그러나 하나로 유장하게 이어져 있다는 것. 바로 그것이 그의 문체학의 또 하나의 특성인 판소리체의 광범위한 활용과 맞닿고 있다. 그 판소리체는 환경학적으로는 칸칸이 재단되고 구획된 도시에 대해 첩첩이 이어진 산을 보여주는 것이며, 윤리학적으로는 부황한 세태 좇기에 대항해 주변머리 있는 올곧은 태도를 견지하는 것이고, 심리학적으로는 의식의 비좁은 세계에 대해 집단 무의식의 거대한 광상을 제시하는 것과 같은 궤도에 놓인다. 그러니, 그의 야심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는 문화의 대안을 꿈꾸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대안 꿈꾸기는 그것에 대한 애정이 지나쳐서 현안과의 긴장을 상실해 버릴 때, 역설적이게도 주변중심주의라고 이름 붙일 수 있는 것으로 떨어질지도 모른다. 작가는 그것까지도 섬세하게 고려하고 있다. 그는 그 함정에 빠지지 않기 위해 부단히 대안의 세계 자체를 객관성의 공간으로 옮겨 놓는다. 그의 문체학의 세 번째 특징이 되는 인칭의 독특한 사용은 바로 그 자기 객관화의 움직임과 맞닿아 있다. 그의 문체 실험은 실로 소설사적 사건이라고 할 만하다.

󰏔 1993, 93 현장비평가가 뽑은 올해의 좋은 소설, 현대문학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