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명교(정과리)의 문신공방
불을 머금은 투명한 물의 세계 -오정희의 『불꽃놀이』 본문
거기에 물이 흐르고 그 물 속엔 불꽃이 어려 있다. 거기란 오정희의 불꽃놀이(문학과지성사, 1995)를 말한다. 불꽃놀이는 물론 놀이이지 장소가 아니다. 그런데도 그것을 거기라 부른다면, 그곳이 물이 휘도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그곳에 부딪치며 격앙된 물의 휘돎, 그것이 불꽃놀이가 가리키는 것이다.
오정희의 물의 표면은 인생이 비추이는 투명한 거울이다. 그 거울은 어찌나 투명한지, 그곳에서 인생은 문자 그대로 물 흐르듯 흘러간다. 모든 것은 “변함없이 되풀이되었고 새롭게 시작”된다. 그러나, 그런데도 이 “깊게 상처받은 느낌”은 어찌된 일인가? 그 평온의 물 밑엔 상처입은 물, 꽉 막힌 물, 부패하는 물, 아편에 쩔은 물들이 난류(亂流)한다. 그렇게 어지럽게 흐르다가 문득 솟구쳐 오르고 추한 거품을 흘리면서 스러져간다.
그러니까, 그 물은 그냥 투명한 물이 아니다. 그 물은 붉은 투명성의 물, 불을 머금은 물이다. 불꽃놀이는 신명난 놀이가 아니라 치욕과 절망과 파괴의 반복 연습이다. 작가의 붓 끝에서 피어오르는 것은 일상의 평온 속에 갇힌 재앙들, 인간의 이름으로 이루어진 모든 것들 속에 은폐된 악마성에 대한 전율이다. 인간의 얼굴을 한 야만은 어떤 특정한 이데올로기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라는 이름 그 자체 안에 있다. 인간답게 살고자 모든 욕망들이 실은 그 짐승을 낳는 것이다.
작가는 어떠한 희망도 암시하지 않는다. “희망은 올 때처럼 갑작스럽게, 속임수처럼 사라졌”음을 그가 오래, 깊이 느꼈기 때문이다. 그로부터의 피난 중에 태기를 느낀다고 해서 희망이 샘솟을 것인가? 그 아이 또한 참혹한 야만 속을 살아갈 것이다. 다만, 그 모든 희망과 부패의 끈질긴 교섭을 더듬어 반추하는 것만이 작가에게 남아 있을 뿐이다. 작가는 “흐린 기억을 더듬어 옛 주인을 찾아오는 도둑고양이” 같다. 그곳에 옛 집이 있을 것인가? 어느 곳에도 시원은 없다. 그것은 “시야 밖으로 사라진 아득한 소실점”일 뿐이다.
그러나, 그 꽉 막힌 부재 속에 외침이, 이야기가 있다. 옛 우물 속에 금빛 잉어는 없었다. 그곳에 있는 것은 그것이 아니라 그곳에 금빛 잉어가 살았다는 할머니의 이야기이다. 그 이야기가 없으면, 거짓 평온 속을 흐르는 우리는 기껏 그림자 없는 혼백일 뿐이다. 그러니, 작가는 독자에게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평안과 참혹의 음모에 대하여. 그에 대해 용쓰는 우리의 헛된 망각에 대하여.
1995. 10. 15, 중앙일보, 치욕의 불꽃을 머금은 투명한 물의 세계
'문신공방 > 문신공방 하나'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산문 읽기, 산문 들기 - 최인호의 「산문(山門)」 (1) | 2022.10.03 |
---|---|
비평은 인식이 체험되는 공간 (0) | 2022.09.15 |
일탈과 우회의 문체-서정인의 「광상」 (0) | 2022.07.11 |
마지막 화해 -이청준의 『잔인한 도시』 (0) | 2022.07.01 |
쉴 때도 싸우는 소설가 -홍성원의 「남도기행」 (0) | 2022.06.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