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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화해 -이청준의 『잔인한 도시』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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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화해 -이청준의 『잔인한 도시』

비평쟁이 괴리 2022. 7. 1. 02:54

처음과 끝에 두 개의 길이 있다. 교도소 길목을 빠져나와 신작로 길로 내려간다. 그 사이에 공원이 있다. 도시도 있지만, 도시는 나타나지 않는다. 거기가 실은 도시이기 때문이다. 거기가 어딘가? 교도소가 도시다. 보라. 공원은 도시의 서북쪽에 위치해 있다. 교도소는 공원 아래쪽에 있는데, 저녁 때 해는 공원입구로부터 교도소 길목 쪽으로 비춘다. 그러니까 교도소는 공원 입구의 동쪽에 있다. 그 방향은, 만일 공원 숲의 아래쪽이라는 정보를 단면도상에서 읽는다면, 공원 숲의 동남쪽이다. 따라서 교도소는 도시와 같은 방향에 있다. 상징적 차원에서 교도소는 도시와 같은 장소성을 갖는다. 실제의 무대가 공원인 소설의 제목이 잔인한 도시인 것은 그 때문이다. 우리의 삶이 감옥, “교도소 교도관들의 출퇴근 행사는 어김없이 계속이 되어 오고 있었고, 밤이면 높다란 감시탑들의 탐조등 불빛들도 그 확고부동한 기능을 발휘하는곳이라는 것을 그 제목은 암시한다. 교도소의 장소학은 깊은 세상 사람들의 망각 속에서도도시-교도소의 존재와 기능이 여전히 현존하고 있다는 가차없는지시이다.

교도소 길목을 빠져나와 신작로 길로 내려간다. 정확히 말하면 공원을 거쳐 신작로 길로 내려간다. 신작로 길은 도시를 빠져나가남쪽으로 향해 난 길이다. 남쪽이라 했지만, 동남쪽이 더 정확한 방향이다. “가을날 저녁 햇살 속에서 그 길을 가는 사내는 등줄기에 한줄기 햇볕을 받기 때문이다. 제도화된 의식의 방향학에 비추어 볼 때, 서북쪽에서 동남쪽으로 가는 길은 비스듬히 가로질러 가는 길이다. 반듯이 가지 않고 비스듬히 가로지르기, 그것은 사실상 관통하기와 동의어이다. 왜냐면, 공원에서 나와 신작로길을 접어들려면, 도시를 뚫고 지나가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신작로길이라는 명명은 그것을 보충하는 정보단위이다. 신작로는 도시로 향해 난 길이다. 사람들은 그곳을 향해 올라오고 있다. 그 길을 사내는 거꾸로 뚫고 내려가고 있는 것이다. 남쪽으로 가는 길은 도시 밖으로 나가는 길이 아니라, 도시를 거꾸로 관통하는 길이다.

작품 속에서 그 관통의 과정은 곧 공원을 거쳐가는 길이다. 왜냐면 공원에서의 사건이 그 과정을 이루기 때문이다. 다시 장소학의 언어로 말하자. 공원 숲은 도시의 서북쪽 일각에 자리잡고 있다. 일각이라는 점에서 공원은 도시에 포함되면서, 숲이라는 점에서 그것은 도시 밖에 있다. 공원은 도시가 특이한 모습으로 변형된 장소이다. 무질서한 인공림인 그곳은, 그러니까, 거꾸로 조성된 도시이다. 그곳의 사건은 도시의 기이한, 다시 말해, 망각을 깨우는, 사건이다.

거꾸로란 무엇을 말하는가? 단번에 말하면, 공원은 교도소-도시의 그림자이다. 사내가 그곳으로부터 걸어나왔을 때, “사내의 좀 구부정한 걸음걸이는 마치 사내 자신이 아니라 그 그림자를 방금 교도소로부터 끌어내어 어깨에 짊어지고 그 길을 무겁게 걸어나오고 있는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공원은 도시의 유령이 그 무겁고 길쭉한 모습을 드러내는 장소이다. 그 유령의 이름이 무엇인가? 소망이다. 교도소 안에서 수감자들이 끊임없이 말로 만들어내는 소망. 그 소망이 모습을 드러내어 변형되는 과정이 공원의 삶을 이룬다.

이 소망의 전개는 두 개의 의미망의 대립으로 구성되어 있다. 공원 입구에서 방생의 집을 운영하는 젊은이와 교도소에서 나온 사내가 각각 소망에 대해 갖는 의미의 대립이 그것이다. 그 대립은 기본적으로 교도소와 도시의 대립이다. 아니, 우선은, 지향성을 가진(개인화된) 두 공간의 대립이며, 결국은 한 공간(교도소-도시)의 두 벡터의 대립이다. 그 대립은 언어로부터 나타난다. 한쪽에서 교도소라고 말하는 곳을 다른 쪽은 가막소라고 말한다. 한쪽이 새를 산다라고 말하는 것을 다른 쪽은 날개를 산다라고 말한다. 후자의 말은 전자의 말의 옛말제유어이다. 그것은, 그러니까, 그것의 변이대립인데, 그 변이대립의 의미는 정황으로부터 단절되고 외연만 가진 언어와 과거와 연결되고 내포를 가진 언어의 대립이다. 간단히 말하면, 절단과 연속의 대립이다. 그 대립의 연장선상에 젊은이의 자유와 사내의 자유의 변이대립이 있다. 젊은이의 자유가 일회적 되풀이라면, 사내의 자유는 해후(끊어진 가족과의 만남)를 포함하는 연속성으로서의 자유이다. 그 대립의 반대편에는 젊은이의 새 파는 행위와 사내의 행위 사이의 대립이 있다. 젊은이의 행위는 대가를 전제로 하는(새로 자유를 보상받고, 동전 스무닢으로 새를 날리며, 반 년의 노역으로 새를 산다) 행위인 데 비해, 사내의 행위는 결과를 생각하지 않는(아들 기다리기, 자기 고향과 가족들에 대한 자랑) 행위이다. 전자가 사용가치를 목표한다면, 후자는 행위가 곧 가치이다. 젊은이의 행위는 소망이 실제의 삶을 목표로 가진 데 비해, 사내의 행위는 소망이 그 자체로 삶이다. 그 대립의 연장선상에 젊은이의 획득으로서의 자유와 사내의 부자유한 공간의 숙명적 수락이 있다(사내가 공원을 떠나지 않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러나 대립의 이 두 측면을 함께 묶으면 힘의 균형이 무너진다. 젊은이에게는 끊임없이 축적(소비)되는 일회성의 자유가 있고, 사내에게는 자유-해후의 연속되는 무소득, 영원히 이루어지지 않고 커지기만 하는 소망이 있다. 바로 거기에 행위 곧 가치가 사용가치에 흡수되는 불가피한 까닭이 생겨난다.

축적된 일회성이란 거대화된 획일성이란 말에 다름 아니다. 다시 말해, 일체의 다른 가능성을 제거하면서 자유의 영원한 되풀이를 강요하는 것이니, 자유가 그 자체로서 거대한 구속의 세계를 이루게 된다. 실로, 젊은이의 자유는 새의 속날개를 잘라버림으로써 공원을 결코 떠나지 못하게 하는 조작을 뒷무대에 감추고 있으니, 사내가 공원을 떠나지 않고 새를 되풀이해 사는 숙명의 수락은 그 조작의 함정에 자발적으로 걸려든 셈이 되고 마는 것이다. 자유-도시가 교도소-도시가 되는 사연이 이로서 그 엄청난 실상을 드러내는 것이다.

사내의 도시 떠남은 바로 부자유한 공간 속에 사는 숙명을 떨치는 행위이며, 바로 그 점에서 그것은 부자유한 공간에 대해 사내가 지속적으로 추구했던 화해를 전면적으로 거부한다는 의미를 띤다. 그러나 그것이 어떻게 가능했었는가? 바로, 속날개 잘린 새와 몸을 부비는 인연을 맺음으로써 가능했던 것이다. 다시 말해, 이 교도소-도시의 공간과 마침내 화해함으로써 일어났던 것이다. 그러니 화해의 거부는 바로 마지막 화해였던 것이다. 그것이 마지막 화해였기 때문에, 도시를 떠나는 사내는 가슴속에 품은 새에게 답답해도 조금만 참으라고 말하는 것이다. 구속의 수락과 자유의 행동이 하나가 되는 것이다. 사내의 도시 떠남은, 그러니, 도시 밖으로 나가는 행위가 아니라 차라리 도시의 저 깊은 곳으로 뚫고 들어가는 행위이다. 도시를 거쳐야 도시를 떠난다는 앞에서의 진술의 속뜻이 바로 여기에 있다 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도시를 벗어나는 행위로써 도시 속으로 몰입하는 것이다. 처음과 끝의 두 길이 실은 한 길인 것이다. 그러나 바뀌어진 지평선 속에. 그 바뀌어진 지평선 앞에 무엇이 펼쳐져 있을 것인가? 그것을 생각처럼 그렇게 쉽게 찾기는 어려운일이다. 그러나 그 어려운 행위를 잔인한 도시는 한 줄기 햇빛을 등줄기에 받으며 걸어가는 사내를 통해 아름답게 형상화하고 있다. 풀기를 잃어가는 햇빛과 사내의 등 구부정한 걸음이 하나의 줄기로 만나는 것, 그것이 영혼의 빛줄기가 되어 좁은 신작로 길[] 그토록 따뜻하고 맑게 빛나게 하는 것이다. 그 빛이야말로 문학이론가들이 아우라라고 말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것은 새를 품은 사내의 몸으로부터 나온다. 구속을 품은 자유의 몸은 프리즘이다. 이 잔인한 도시가 갑자기 희한하게 변신을 한다. 이 획일성의 도시가 다채색의 풍경으로 술렁이기 시작한다.

󰏔 1994, 이청준, 문학상 수상 작품집, 훈민정음